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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에 목련꽃이 피면 거창의 봄이 시작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몇 그루 자목련은 아직 봉오리지만 서원 곳곳에 하얀 목련꽃들이 흘러넘친다. |
가까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인다, 수억만 개 꽃망울들이. 갓난쟁이 주먹처럼 꽉 오므리고선 꿈쩍 않는다. 활짝 피었으면 좋았겠지만 계절의 심사는 도통 읽을 수가 없다. 대구는 이미 곳곳이 환하지 않나. 거창으로 향하는 88고속도로에서 벚꽃과 개나리와 멀리서 무리 지은 산벚들과 두어 그루 현란한 동백을 보았다. 꽃은 달성 논공까지였다. 남도의 벚꽃이 일주일쯤 늦어져 이번 주말 즈음에야 꽃비가 시작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봄꽃의 북상 속도는 하루 20㎞. 그러니 주말을 지나고도 닷새는 지나야 거창에 봄 벚꽃이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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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곡저수지 너머 덕천서원을 본다. 덕천서원은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사된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 금성대군과 충장공 이보흠을 기려 세운 곳이다. |
◆거창읍 장팔리 덕천서원
장팔리는 거창읍 내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 마을이다. 웅곡천을 따라 깊이 들어가면 골짜기 끝에 웅곡마을이 있다. 곰발바닥처럼 생겨 웅곡이라 하고 거창 사람들은 곰실이라 부른다. 곰실 동구 도로 양쪽에 지나치기 쉬운 두 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서 있는데 왼편에는 덕천서원, 오른쪽에는 거창 유원지라 새겨져 있다. 벚나무가 늘어선 웅곡천은 옛날 소풍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거창의 수많은 명승을 두고 이곳을 '거창유원지'라 이름 했으니 꽁꽁 숨겨두고 즐긴 그들만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도로 옆 둔덕진 터에 덕천서원이 자리한다. 덕천서원은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사된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 금성대군과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을 기린다. 충장공의 18세손인 영천이씨 학두(學斗)가 부지를 조성해 세웠다고 한다. 건립 시기에 대해 서원 앞 안내 판석에는 '1947년 무오(戊午) 봄'이라 새겨져 있는데 연도와 간지가 맞지 않는듯하고 거창군에서는 1979년이라 소개하고 있다.
서원은 아주 오랫동안 무언가를 기다리다 지친 모습으로 고요하다. 서원 앞으로 멀리 거창읍이 차르르 펼쳐진다. 앞마당에는 목련꽃 아래 두 분의 기념탑이 장장하게 우뚝하다. 덕천서원에 목련꽃이 피면, 거창의 봄이 시작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원 곳곳에 하얀 목련꽃들이 흘러넘친다. 꽃들은 완벽한 아이들처럼 건강하다. 몇 그루 자목련은 아직 봉오리지만 덕천서원에 백목련이 피었으니 거창의 봄은 시작되었다.
서원 뒤쪽으로는 작은 숲과 작은 저수지가 있다. 숲에는 시멘트 탁자와 시멘트 의자가 나무들처럼 자라 바람의 휴게실 같다. 스산하지만 차갑지 않은 어떤 기다림을 보는 듯 친밀한 감정이 든다. 웅곡1이라 이름 붙여진 저수지는 수위가 낮다. 한가운데에 누군가 돌탑을 쌓아 두었고 그 주위를 두 마리 물새가 탑돌이 하듯 돈다. 물가에는 대앙정과 호산정 두 개의 정자가 있다. 대앙정 마루에 의자 세 개가 나란히 앉아 목련을 등지고 먼 곳을 본다. 호산정은 저수지를 가로질러 수목으로 둘러싸인 서원 일대를 바라본다. 물가의 가지마다 연두가 시작되었다. 물빛은 연두와 하늘빛이 뒤섞인 초록이다. 초록의 물속 풍경은, 세계가 변하기 전의 풍경이다. 목련이 지고 나면 이 물가와 곰실 천변은 벚꽃으로 뒤덮인다.
거창에는 덕천서원, 건계정, 용원정, 수승대, 월성계곡으로 이어지는 벚꽃 코스가 있다. 덕천서원과 건계정, 수승대가 가장 먼저 비슷한 속도로 만개한다고 한다. 그 다음이 용원정, 그리고 나면 월성계곡 일대에 수양벚꽃이 피어난다. 곰실의 덕천서원은 아는 사람만 아는 벚꽃 명소였지만 근래에 유명해졌다. 서원 앞 웅곡천에 나란히 놓인 약수교, 호산교, 폭포교는 벚꽃 궁륭이 황홀한 핫스폿이다. 목련꽃이 하나둘 고개를 숙일 때쯤 벚나무 꽃망울들이 터지기 시작한다. 수면이 흔들리고 세상은 순식간에 변한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려니 울렁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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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계 위 쌀다리 너머 벚나무가 장하다. 그 뒤로 용원정과 효열각이 자리한다. 용계의 바위에는 해주오씨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
◆마리면 고학리 용원정
3번 국도 거함대로를 타고 마리면 고학리(皐鶴里)로 간다. 지나치며 멀찍이 가늠해 본 건계정 계곡은 스산했고 이따금 눈길이 쏠리는 회양목의 노랑연두가 몽글했다. 그렇게 20여 분을 달리면 기백산 골짜기에 자리한 고학리 입구 병항마을이다. 마을은 약 400년 전 해주오씨 구화(九華) 오수(吳守)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기백산 줄기가 꿈틀거리며 여기까지 흘러내려온 것을 용폭(龍瀑)이라 하고 마을 앞을 흐르는 천을 용계(龍溪)라 부른다. 기암괴석이 흩어져 있는 용계에 돌다리가 놓여 있고 그 너머에 벚나무가 장하다. 그리고 그 뒤에 용원정(龍源亭)이 자리한다. 용원정은 구화공을 기려 그의 후손들이 1964년에 세운 것으로 '용폭의 근원을 생각하는 정자'다. 이는 조상의 근원을 찾겠다는 의미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는데 정자 곁에 돗자리 편 객들의 봄놀이는 본격이다. 좁은 돌다리 위로 축 늘어진 벚꽃가지가 만개의 순간을 상상케 한다.
돌다리는 한 개의 중심다리 받침돌 위에 두 개의 큰 돌을 연결하여 마치 거문고처럼 누워있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쌀다리'라고 부른다. 고학리 서쪽은 함양군 안의면으로 3번국도 옛길은 조선 시대에 한양으로 가는 삼남 대로였다. 그래서 이곳에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오가는 길손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이에 1758년 해주오씨 오성재(吳聖載), 오성화(吳聖化) 형제가 백미 1천섬을 내놓았다. 그리고 큰 돌을 구해 석공에게 돌을 다듬게 하고 수백 명의 일족이 3일 동안 운반하여 다리를 놓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쌀다리'다. 당시 안의 현감 이성중이 이곳을 방문하여 오씨 문중이 크게 번창하는 것은 이런 공덕 때문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다리는 1917년 수해 때 한 칸이 떠내려갔는데 1964년 3월 후손들이 다시 고쳐 지었다. 이제 쌀다리는 정자를 오가는 다리로만 이용되고 벚꽃 시절에는 줄 서서 기다리는 포토존이다.
쌀다리 근처에는 성재·성화 형제의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쌀다리 입구 오른쪽에는 오세안(吳世安), 오세원(吳世元), 오석규(吳錫奎)의 선덕을 기려 면민들이 세운 시혜불망비 3기가 서 있다. 용원정 옆에는 '구화오공유적비(九華吳公遺蹟碑)'가 큼직한 이수(龜趺) 위에 당당하다. 정자 왼편에는 반듯한 효열각이 자리하고 안에는 효열 청주한씨와 효자 오유모(吳有模)를 기리는 비석이 모셔져 있다. 용계의 바윗돌에는 해주오씨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공간 전체에 해주오씨들의 자부심이 넘친다. 이들을 둘러싸고 느티나무, 왕벚나무, 버즘나무 등이 무성하다. 꽃봄은 서두르느라 못 만났는데 벌써 여름의 청량이 기대된다. 마음이 너무 앞서니 이를 어쩌나.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Tip
88고속도로 광주방향으로 가다 거창IC에서 내린다. 톨게이트 앞에서 군청 방향 우회전, 직진하다 로터리에서 군청 방향으로 간 뒤 네거리에서 좌회전한다. 거함대로를 따라 직진하다 왼편에 들꽃마을 아파트가 보이면 좌회전해 장팔로를 따라 계속 오르면 덕천서원이다. 용원정은 거함대로를 타고 함양 방향으로 가다 고학리로 빠져나간다. 섬거리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조금 가면 오른쪽에 용원정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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