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한국인의 '소울푸드' 미역(1)...1970년대 양식 성공…가공식품에 첨가하며 수요 급증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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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29   |  발행일 2022-04-29 제33면   |  수정 2022-04-29 08:13
울릉도·독도 국제보호종 '넓미역' 동해특산종 '대황'
어촌마다 '미역' 위한 민속문화…한식 원류와 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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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진도, 부산 기장과 함께 한국 3대 미역 특산지로 유명한 울진군 북면 나곡3리 어민들이 채취한 미역을 건조장에서 말리고 있다.

한국인의 탄생과정에 가장 곡진하게 개입하는 음식은 뭘까? '미역'이다. 아이를 낳은 며느리를 위해 시어머니가 손수 미역국을 끓여준다. 미역국이 끓는 동안 시어머니는 연신 양 손바닥을 비비며 삼신 할매를 향해 치성을 드린다. 해산용 미역을 살 때는 가격을 깎지 않고 최상품만을 엄선한다. 그 미역이 바로 '산모곽'이다. 이 미역은 오직 산모만 먹을 수 있다. 시어머니는 삼칠일(21일간) 동안 외부인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대문 앞에 금줄을 매단다. 부정(不淨) 타는 걸 우려했기 때문이다. 첫 미역 국물과 며느리의 초유를 반드시 굴뚝 안에 뿌려준다. 천지 기운을 선순환시켜보려는 그 시절만의 특별한 통과의례다. 이제 그 전통은 사라지고 없다. 그래도 미역은 건재하다. 현재 김과 함께 한국인의 밥상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얼마 전 각별한 책 한 권이 우송돼 왔다. 지은이는 김남일 환동해지역본부장. '공무원이 이렇게 전문적이고 디테일 있는 책을 내도 되나'란 독백을 해봤다. 직접 경북 동해안 어촌계 해녀와 동행하면서 미역 채취 현장에서 체험한 바와 미역 관련 사료를 바탕으로 적었다.

한국인은 미역의 민족. 수천 년 동안 섭취해왔다. 대중화된 것은 1970년대 미역 양식이 성공하면서부터. 특히 남해안을 중심으로 전복 양식이 보급되고 라면과 같은 가공식품에 미역을 첨가하면서 수요가 급증한다.

현재 한국의 해양은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은데 실은 점차 고사 중이라는 게 과학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특히 동해안의 해초와 해조류는 그 희소성 때문에 체계적으로 관리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수도권과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경관과 전망 등이 좋은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리조트나 소규모 풀빌라와 브런치 카페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전통 어촌문화 환경을 해치고 있다. 대규모 화력발전소나 항만개발로 연안 침식 또한 심각해지고 있으며, 기후변화의 지표인 해조류나 해초류가 사라지는 백화현상으로 인해 바다 사막화 현상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이참에 동해의 미역문화를 비롯한 해양유산을 재조명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 그 흐름의 일단을 환동해지역본부가 감당하고 있다. 경북동해안 해녀인문학, 경북동해안 포구역사 및 바지게꾼들의 삶 등을 총서 형식으로 펴내고 있다.

경북 동해안에는 해양생태계와 어촌문화 공동체가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 많다. 특히 울릉도·독도에는 국제보호종인 '넓미역'과 동해특산종인 '대황'의 군락지가 있다. 울릉도의 연안 전체가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해마도 서식하고 있다. 독도까지 포함하면 세계적인 생태섬이자 해초류와 해조류의 생태적 보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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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 북면 나곡3리 미역 채취 광경. 〈환동해지역본부 제공〉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미역을 먹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 이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다. 8세기 당나라에서 발간된 일종의 백과사전인 '초학기(初學記)'에 '고래가 새끼를 낳은 후 미역을 뜯어 먹은 뒤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고려 사람들이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초학기는 8세기 초 중국 당나라의 서견 등이 편찬한 유서(類書·일종의 백과사전)로 30권으로 구성돼 있다.

정작 우린 미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미역의 어원은 뭘까?

고구려에서는 우리 말 '물'을 '매(買)'라고 한자로 표현했다. 미역을 '여뀌'라는 풀과 비슷하다고 해서 '물여뀌'라는 의미로 '매여뀌'라고 불렀다. '매여뀌'에서 'ㄲ' 아래 모음이 탈락하면 '매역'이 되고 '매역'에서 모음변이가 일어나 오늘날 '미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는 고문헌과 제주 방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미역을 '메역'으로 기술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메역'이라 부르고 있으며, 미역이 많은 '바당'(해녀들이 물질하는 곳)을 '메역바당'이라 부르고, 우뭇가사리가 많은 바당을 '우미바당'이라 부른다. 이를 종합하여 단순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매여뀌 → 매역 → 미역.

미역의 연대기를 따라가면 한민족의 생활문화, 그걸 넘어 한식의 원류와도 상통하는 걸 알 수 있다. 지금도 미역을 생산하는 어촌마을마다 미역을 위한 다양한 민속문화가 멸실 되지 않고 현대인과 소통하고 있다. 그 흐름 속으로 들어가 본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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