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타임] 현장만 보지 말고, 현실도 보자

  • 노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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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29   |  발행일 2022-08-29 제30면   |  수정 2022-08-29 07:03

[하프타임] 현장만 보지 말고, 현실도 보자
노인호 사회부기자

물난리로 서울 반지하에 살던 일가족 3명이 숨지면서 서울시는 지하·반지하는 주거 용도로 사용 못 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하고, 기존 주거용 지하·반지하는 20년 동안 순차적으로 없애기로 했다. 또 이들이 지상층으로 올라오면 월 20만원씩 최장 2년간 보장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현장과 현상은 봤지만, 그곳에서 사는 이들의 현실은 빠진 헛소리다.

제대 후 2001년 복학하면서 자취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당시 대구를 기준으로 주택 2층 전세를 얻을 수 있는 돈을 주셨다. 하지만 그 돈으로 전세를 얻을 수 있는 서울 내 주거 형태는 지붕 위 옥탑방이나 반쯤 땅속으로 들어간 반지하뿐이었다. 그렇게 1천700만원으로, 장례식장에서 10초 정도 떨어진 다가구 주택 내 반지하 전세를 구했다. 잠을 자기 위해 방바닥에 누우면 땅속, 일어나면 목만 땅 위로 올라오는 그런 곳에서 2년가량을 지냈다. 장마철에 물이 들어차는 경험은 못 했지만, 항상 보일러를 틀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천장 모서리에 검게 곰팡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또 취객 탓에 내가 사는 곳에서만 비가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아 한여름에도 창문을 열어 두지 못했다.

시대를 노래하는 정태춘씨가 1996년에 발표한 노래 '우리들의 죽음'은 영세 서민 부부가 맞벌이를 나가면서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밖에서 문을 잠근 지하 셋방에서 불이 나 두 자녀를 잃은 실제 사건을 노랫말로 만들어 당시 현실을 전했다.

이 노래가 발표된 이후 26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 영세 서민의 삶은 지하에서 겨우 반지하 정도로 올라 오는데 그쳤다. 현장만 보고, 그들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의 책상머리에 내놓은 대책 탓일 게다. 지금 내놓은 서울시의 정책대로 반지하를 없애면, 물이 들어차기도 전에 살 곳을 잃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현장에 가서 현상만 본다고 답이 나오지 않는다. 더욱이 땅 위에서 반지하를 내려다본 이후 내놓으면 오답일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최소한 반지하에서 밖을 올려다보는 정도의 노력, 그들의 눈높이에서 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20년, 아니 200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 중 그 누구도 땅속에서 잠들어 있다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은 없는 세상, 모두가 마른 땅을 딛고, 같은 하늘을 보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현장'이 아니라 '현실'에서,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노인호 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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