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노란색 종이 뭉치

  • 김형엽
  • |
  • 입력 2023-01-12  |  수정 2023-01-12 06:50  |  발행일 2023-01-12 제22면

[취재수첩] 노란색 종이 뭉치
김형엽기자〈경제부〉

출근을 서두르던 중 책상 위에 쌓인 '노란색 종이 뭉치'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가스요금 청구서를 필두로 한 각종 공과금 지로용지였다. 언제부터 책상 위에 놓여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마치 습관처럼 납부일을 미뤄왔다는 사실이다.

청구서를 집어 든 김에 바로 납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납부 금액과 날짜, 계좌번호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가스요금이 많이 나와서 의아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전달 미납요금이 함께 청구돼 있었다. 이른바 '멍청비용'은 그렇게 발생했다. 미리 납부했다면 내지 않았어도 될 이자가 추가로 딸려 온 것이다.

얼마 안 되는 푼돈이라 여길 수 있지만, 습관적으로 요금 납부를 미뤄온 내가 여태껏 낸 '멍청비용'은 꽤 많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요금 미납 습관이 생긴 것인지 기억을 더듬어보다 꽤 먼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야 했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공공요금을 3개월치씩 미뤄가며 한꺼번에 납부하기를 반복했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자취하기 전까지 스스로 요금을 낸 적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늘 부족한 생활비를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아무리 난방을 해도 허술하게 지어진 자취방 천장과 벽 사이로 스미는 '웃풍'은 무서운 기세로 가스 요금을 빨아당겼다. 생활비를 아껴 한꺼번에 내야겠다는 다짐으로 버텼지만, 다음 달 가스요금은 매서워진 추위만큼 더욱 불어날 뿐이다. 결국 3개월 미납으로 인한 공급 해지 통보를 받고 나서야 미납요금을 한꺼번에 내곤 했다.

그렇게 나는 여름철 냉방비, 겨울철 난방비를 미뤄가며 궁핍함에 이자를 붙여왔다. 노란색 종이 뭉치에 찍힌 거액을 마주하기 무서워 외면하는 습관을 키워온 셈이다. 당시엔 궁핍함에 이자가 붙었다면 이제는 멍청비용을 내고 있다는 점만 달라졌다. 더는 미루지 않기 위해 결국 가스요금 자동납부를 신청했다.

정부는 한국가스공사에 미수금이 8조8천억원대까지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1분기 가스요금을 동결했다. 요금인상에 따른 동절기 국민부담을 고려한 결정이다. 계절 요인으로 요금 인상 시 고통이 크기 때문에 인상 시기를 미뤄 준 셈이다.

가스요금은 동결됐지만 1분기 전기요금은 kwh(킬로와트시) 당 13.1원 인상됐다. 앞으로도 전기·가스요금은 지속적으로 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겨울 가스요금에는 미납으로 인한 이자 비용이 덜 발생할 것 같다. 누군가는 궁핍함으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는 멍청해서 지불해야 할 비용 부담을 조금쯤 덜게 된다.
김형엽기자〈경제부〉

기자 이미지

김형엽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경제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