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작가 김영진(1) 경주 남산자락서 3천여 점의 실험예술에 올인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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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10 08:49  |  수정 2023-02-10 09:26  |  발행일 2023-02-10 제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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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79년 대구현대미술제의 5명의 산파역 중 한 명인 작가 김영진. 경주 남산 자락에서 은거 중인 그는 지난 50여 년 사투에 가까운 3천여 점의 실험예술에 올인했다. 덕분에 오는 5월 대구미술관 그리고 올해 한국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공동기획 순회전에 초대를 받았다.

충분히, 아니 능히, 그러면서도 굳이, 나는 전위(前衛·Avant-garde)이고 실험으로 살다 가려 한다. 지금 내 심신은 중력을 벗어난 인터스텔라(Interstellar·星間). 나는 거기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처럼 예술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겨냥하지 않고 모든 걸 겨누는 혁명적 열정이어야겠지. 타인을 무시하면서도 자신을 철저하게 넘어서는 인생. 그래서 나는 늘 잘하는 게 아니라 새로워져야 한다. 최고가 아니라 최선에 치를 떨어야 하고. 화가가 아니라 작가라서 그럴까.

나는 작가라기보다 잡부일 것 같다. 염색공, 용접공, 미장공, 타일공, 페인터, DJ, 전기공, 운전사, 배달꾼, 디자이너, 농부, 도예가, 사진가, 그러다가 누구의 선생이 되기도 하고.

작가가 되면서 캔버스 작업과 인연을 끊었다. 미술학원도 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나는 나를 해체하고 있었다. 마르셀 뒤샹 이후 현대미술이란 사실 사망 선고를 받았던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그림=작가'란 도식을 경멸했다. 나는 그림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그건 서울대 미술대 3학년 재학생 10명으로 구성된 벽동인이 덕수궁 서쪽 정동 골목길에서 반국전 시위 차원의 가두전을 감행한 혈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계명대 미대 시절, 지도교수였던 정점식과 잦은 갈등을 빚었다. 나는 별로 유별스럽지 않았는데 그는 내가 어디로 튈지 몰라 늘 노심초사했다. 존경은 하면서도 그에 대한 서운함이 많았다.

염색공·타일공·디자이너·도예가
작가라기보다는 잡부 같은 삶
지상의 모든 물성이 내 영감의 출발
연도별 시리즈를 작품명으로 지어
작가의 절정은 절망으로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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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작업실 실내 전경.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성은 내 영감의 출발이다. 상관없어 보이는 물건을 연결해 새로운 작품으로 품어냈다. 그 오브제가 절정에 가까워질수록 문명의 몫이 아니라 자연의 몫으로 승화하는 걸 나는 경험했다. 내가 창작자이면서 감상자이고 비판자여야만 했다.

나는 작품에 제목 다는 게 싫다. 그래서 연도별 시리즈를 작품명으로 대신해 왔다. 설치작업이 주종이다 보니 여느 갤러리와 무관할 수밖에 없었다. 판매와 무관할 수밖에 없었다. 곧잘 절벽에 도달한 심정이 들면 혼자 이렇게 독백한다. '작가의 절정은 항상 절망의 방식으로 갈무리된다.'

철저하게 '묻힌 김영진'이었고 그러면서도 늘 '시한폭탄 김영진'이었다. 아득한 과거이면서도 유구한 미래가 되고 싶었다. 전략적이고 설계적이고 정제된 걸 경계한다. 완성일 것 같은 작품을 파괴할 때가 많다. 순간 파고드는 우연한 흔적이 가장 예술적이었다.

잘 되고 다 된 것 같은 걸 경계해야 된다. 몸통을 버려야 할 때가 많다. 오히려 거기서 바스러져 나온 조각, 혹은 녹물 같은 게 예술의 진면목일 수 있다. 자연은 그렇다. 내색하지 않고 작정하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모든 만상을 제자리로 회귀시킨다. 그 저의는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 자연한테 노벨상을 줄 수 있는 자가 누군가. 준다 해서 받을 자연이겠는가. 영원에 걸쳐 주야장천 변화만 하는 그러면서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저 무적의 힘 앞에 나는 아직 할 말을 잊는다. 그래서 가능한 하늘을 올려 보지 않으려 한다.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는 게 낫다. 습관적으로 기상하자마자 두 시간 남짓 남산을 거닌다. 거기서 작품의 모티프를 얻는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내 생의 몇 장면이 있다. 그건 한국 현대미술의 몇몇 변곡점이었다고 믿는다. 하나는 1960년대 서울대 미술대 옆 교내 카페로 불렸던 '빌라다르(Villa d'art·'예술의 별장'을 뜻하는 프랑스어)' 시절, 1972년부터 시작된 서울 앙데팡당전 시절 그리고 1974~79년 대구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총궐기 같은 '대구현대미술제' 시절이다. 나는 그 세 흐름의 본류를 걸어왔다. 그래서 몸과 맘, 영혼에까지 신경망처럼 연결돼 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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