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작가 김영진(2) 서울 국립현대미술관·뉴욕 구겐하임미술관서 잇단 러브콜…'50년만의 봄날'

  • 이춘호
  • |
  • 입력 2023-02-10 08:56  |  수정 2023-02-10 08:57  |  발행일 2023-02-10 제34면

2
경주 남산 작업장 초입에 앉은 김영진. 작가라기보다 잡부일 것 같다. 염색공, 용접공, 미장공, 타일공, 페인터, DJ, 전기공, 운전사, 배달꾼, 디자이너, 농부, 도예가, 사진가, 그러다가 누구의 선생이 되기도 한다.

나는 '대구의 첫 약국'으로 불리는 동성로 대동약국 집 아들이었다. 동아백화점에서 시청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다. 내 맘은 늘 서울대 미대에 있었다. 입학시험을 앞둔 전날 밤 무슨 호기였던지 지인과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다음날 일어나 달려가 보니 시험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낙방, 분통이 터졌고 오기가 발동했다. 나는 대구로 내려오지 않았다. 서울대 미대생인 양 그 교정 언저리에 닻을 내리고 당시 예술쟁이들과 세월을 낚았다.

그 공간은 다름 아닌 내가 인프라를 구축했던 '빌라다르'다. 서울대가 관악산 캠퍼스로 옮겨가기 전 연건동에 있었던 교내 카페였다. 나는 거기 '문화깡패'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대 '한 예술, 한 문화' 한다는 친구들을 서로 연결해주었다. '아침이슬'을 작곡한 후배 김민기도 그 공간의 혜택을 받았다. 나는 500만원을 빌려 그 공간을 오픈했다. 그리고 3년6개월간 별별 실험적인 문화 운동을 다 벌여본다. 그 공간을 축으로 훗날 한국 포크 뮤직사에 한 획을 긋는 굵직한 뮤지션이 탄생한다. 김민기, 이현경과 박영애가 결성했던 여성 포크 듀오 현경과 영애, 68년 조소과에 입학한 이정선 등이다.

그리고 대구 출신인 정강자의 퍼포먼스와도 맞물려 돌아간다. 그녀는 1968년 5월30일 서울 종로구 종로1가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정찬승·강국진과 함께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해프닝을 선보이며 이름을 알렸다. 이 작품은 당시 미술계와 사회 전반에 걸친 부조리에서 벗어나 여성해방을 추구한 행위예술로 평가받았다.

대구의 첫 약국 '대동약국' 집 아들
서울서 문화 인프라 '빌라다르' 구축
'아침이슬' 작곡한 김민기도 어울려

40년전 만든 풍선간판 세계로 퍼져
도무지 팔릴수 없는 작품 쏟아 냈지만
언론지상에 내 이름도 보이기 시작

올해는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도
5월 대구미술관서 평생의 작품 전시


4
젊은 시절의 김영진 모습과 포스터 및 각종 사진자료.

◆앵포르멜 & 앙데팡당

이제 고인이 된 부산 출신의 갑장인 이동엽(1946~2013). 홍대 미대 출신인 그는 한국 첫 단색화 전시로 일컬어지는 75년 일본 동경화랑의 '한국 다섯 명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 전'에 박서보, 허황, 서승원, 권영우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동엽은 7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서울 앙데팡당전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나는 2회부터 몇 년 그 전시회의 '무서운 아이'로 불린다. '설치미술'이란 개념도 없을 때 난 난동을 부렸다. 진흙과 석고 더미에 내 몸을 던져 분절된 신체의 역설적 미학을 보여주었다. 모래 속에 몸을 파묻고 석고에 내 얼굴을 찍고 오욕칠정의 표정을 위해 머리카락도 밀어버렸다. 해프닝과 퍼포먼스, 그리고 비디오아트, 개념미술 등을 다 동원한다. 이미 관습과 통념에 의해 익숙해진 회화를 낯설고 생경하게 해체시켜 나갔다. 국내는 여전히 동양화가 주류였다. 그 진영에서 날 어떻게 봤겠는가. '미술계의 빨갱이'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훗날 한국 신개념 간판의 효시가 되는 '풍선간판'도 그 무렵 대구에서 태어난다. 40년 전 화실에 있던 수레용 선풍기를 분해하여 스테인리스 밥그릇 위에 올려놓고 나일론 흰색 천을 틀로 박아 만든 작업이다. 20년 후 내 자료집이 나간 후 길가에서 간판으로 세워지고 있었다. 업자들이 상업적으로 벤치마킹한 모양이다. 그 아이디어는 지금 전 세계를 떠도는 디자인 물로 확산됐다. 바르셀로나 축구장 응원용 풍선에서 남미의 골목까지 퍼져나갔다. 엄밀히 말해 그게 저작권법에 위배되지만 나는 그 어떤 로열티도 못 받았다.

나의 두 번째 절창은 '대구현대미술제'였다. 잠시 대구가 한국 현대미술의 요람이 되는 순간이었다. 5회 동안 박서보, 이우환, 이건용 등도 참여했지만 전 대회에 모두 참가한 주역은 5명. 나를 포함 이강소, 박현기, 최병소, 황현욱. 이강소가 그 미술제를 생각해 냈다. 이후 나만 빼고 모두 한 문파를 개척한다.

◆작업실의 대숲바람

내가 작업에 열중할수록 나는 더 풍화되어간다. 내 작업실도 그 연장선에 있다. 서울의 삶을 정리하고 30년 전 경주로 내려오기 전 나는 심신이 바닥이었다. 1년 정도 지리산 언저리를 뜬구름처럼 떠돌며 요양을 했다.

지금은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의 남산 동쪽 끝자락, 통일전의 지기를 품고 있는 한 야산 대숲 속에 내 작업실이 숨어 있다. 입구가 너무 으스스하다. 무슨 철물상, 아니 철물점 같은 분위기다. 한창 작업을 하다 보면 내가 무슨 음지식물이 된 것 같다. 겨울에는 난방도 되지 않는, 너무나 냉기 가득한 거기에 서면 상대적으로 내 전의(戰意)는 더욱 번쩍거린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 가지가 자그락 자그락 창문을 긁는다. 녹슨 철문을 여는 소리가 스며 나온다. 내게 그건 아방가르드 음악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았다. 매달리지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냥 밥을 먹듯 작업만 살아나갔다. 진정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세월이 먼저 알아보는 것 아닌가. 기성 미술계는 허교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그 상업성을 나는 저주했다. 나는 갈 데까지 가보려 했다. 내 실험의 끝, 그게 내 화두였다. 희한하다. 가끔 봄의 새싹처럼 도반이 찾아온다. 도자기의 물성을 찾아 경주로 잠시 내려온 '오리화가' 이강소, 작고한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과 친한 대구 실내건축의 신기원이 된 박재봉과 석굴암 동굴의 어둠을 더듬기도 했다. 신문지를 연필로 다 지워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 최병소, 국내 비디오아트의 신기원인 박현기와 죽이 맞아 반월당 행복식당에서 통음했다. 이제 그 모든 게 추억의 장으로 넘어갔다.

지난 50년간, 도무지 팔리지 않는, 아니 팔릴 수가 없는, 3천여 점의 작품을 쏟아냈다. 그리고 몇 년 전 내 작품 도록 구실을 하는 예술론을 책으로 묶었다. 내 예술의 모든 방향을 간추렸고 그 지향점을 언급했다.

◆김영진의 봄날

근자에 내 이름이 언론지상에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내 작품을 사 가지 않나, 그 작품을 뉴욕 구겐하임 측이 러브콜했다. 그 흐름에 있는 게 올해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주최하는 '한국 실험미술 1960~1970'전이다. 이중섭, 박수근과 더불어 한국적 정서를 구현한 대표 작가로 꼽히는 장욱진의 회고전과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구림(1/24초의 의미)의 개인전, 그리고 강국진,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최병소 등 한국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26명의 작품과 자료 등 100여 점이 소개된다. 5∼7월 서울 전시에 이어 9월 구겐하임미술관, 내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 전시가 예정돼 있다. 그리고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에도 참가할 계획이다. 오는 5월에는 대구미술관 2층 전관에서 평생의 작품을 전시하게 된다. 나름 고생을 했고 나름 보람을 느낀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