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보름간의 훈련만 거치고 북한군과 맞붙은 772명의 어린 영웅들

  • 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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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24 08:35  |  수정 2023-03-24 08:55  |  발행일 2023-03-24 제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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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상륙작전의 유격대원 조형물.

장사 해안은 평화로웠다. 백사장에 물결이 끝없이 밀려왔다. 세월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출렁이고 있었다. 바다에는 파도의 리듬 사이사이 끝없는 포말이 하얀 환영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이 장사 바다에 스며들어 갈매기 날개에 혼을 실어 보내기도 하고. 삼월의 햇빛에 물비늘이 반짝이면, 아득한 내면에서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소리가 공명을 일으켰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으로 간다. 그건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처절했던 6·25 전쟁의 도록을 다시 펼치는 것이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그 불멸의 상처와 우리의 피와 뼈에 새겨진 유전자의 아픔을 따라가 보자.

6·25 교착상태 타개 위한 양동작전
인민군의 후방 주요 보급로 차단좣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토대 마련
139명 전사·92명 부상 인명손실
영웅들 기리기 위해 기념관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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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선을 기다리는 장사 유격대원들.

그러니까 1950년 6월25일 오전 4시경, 122m 인민군 곡사포 1천대가 일시에 섬광을 터트리며 포격을 시작했다. 밤하늘을 갈가리 찢는 폭음, 이 세상의 모든 안젤루스의 종이 또 한 번 전쟁을 알리는 소리였다. 인민군의 기습 공격은 전면 공세였다. 인민군 이학구 대좌의 지휘에 곡사포 중대 포사수들이 자기들이 발사한 폭탄이 터지는 것을 관측하면서 사거리를 가늠했다. 그때 이학구의 수신호 지시로, 역시 소련제 T-34 탱크들이 지축을 울리는 으르렁 괴성을 지르며 38선을 넘어갔다. 하늘에는 야크기와 슈토르모비크기가 서울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인민군 보병도 나팔 소리 신호에 따라 38선을 넘어 침공했다. 그때는 악천후였다. 여름 장마가 시작,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인민군 9만명이 남한을 기습 공격해 가히 파죽지세였다. 나중에 맥아더가 말한 것처럼 북한은 '코브라처럼' 침공해 왔다. 탱크와 정예의 인민군 앞에 무기 부족과 훈련이 덜 된 국군은 식겁을 하고 방어선이 무너지곤 했다. 춘천에서 김종오의 6사단이 잠깐 인민군을 저지했으나 열세의 저항선은 바로 괴멸되었다. 전쟁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것은 세계사에도 전례가 없는 패전이었다. 또 인민군의 남침을 저지한다고 한강 다리를 폭파하여 강북의 수많은 국민과 국군들이 사상당한 것은 큰 참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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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비


그러나 우여곡절을 거쳐 한강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한편으로 한국동란의 첩보를 접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 애치슨 그리고 참모들은 이전까지 한국을 그들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1950년 1월 발표된 대만, 대한민국, 인도차이나반도를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광대한 만주와 동해 사이에 있는 한반도를 마치 남자의 샅에 달린 남근처럼 알고 있었다. 한반도는 첩첩산중으로 산이 끝이 없고 억압, 불행, 빈곤, 침묵으로 가득 찬 '은둔의 나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문맹률이 95%임에도 사상의 대립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세력과 공산주의로 통일하자는 세력이 결사적으로 싸우는 골치 아픈 나라로 비하했다. 그뿐 아니라 해방 후 그 엄청난 지원과 원조에도 미국의 등에 예사로 총질하는 배신의 나라로 매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2차 대전 후 세계경찰국이 된 미국(팍스 아메리카나)이 한국동란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공산화는 초읽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아슬아슬하게 미국을 포함한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었고, 유엔 최고 사령관에 맥아더가 임명된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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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호 안에 있는 전승기념관.


그러나 미군과 유엔군도 전선에서 강력한 인민군에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엔군의 주축인 미군의 극동 전력은 일본에 주둔한 보병 3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가 전부였다. 게다가 이들 보병사단은 정규사단의 3분의 1 정도였다. 그건 '허식과 몽상'에 빠진 미국의 오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천재 전략가인 맥아더는 신속하게 제24사단 및 25사단을 한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금강 방어선에 투입된 미군 제24사단의 대전차 무기로는 시효 지난 바주카포가 다였다. 며칠간의 전투에서 서로 통신마저 끊기고 제24사단장 딘 소장을 비롯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그때는 인민군에게 포로가 없다는 것을 미군은 모르고 있었다. 인민군은 사로잡은 포로들의 손을 뒤로 묶은 다음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이제 전선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워커 라인으로 불리는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인민군의 최정예 3개 사단이 왜관에 집결했다. 낙동강을 도하해 대구에 주둔한 미 제25사단을 격멸할 작정이었다. 당시 주력이었던 미 제25사단만 격멸하면 북은 한반도를 해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미 본토의 지원군이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요원해 맥아더는 제25사단 병사 한 명에 한국군 병사 한 명을 보강해 3만명의 병력으로 이미 낙동강을 건넌 인민군과 칠곡 다부동에서 대치했다. 유엔군은 병력이 부족해 백선엽의 국군 1사단과 조병옥 장관 휘하 경찰 오천 명까지 방어에 투입하였다. 보급으로는 대구시민들이 자원, 지게 부대를 만들어 주먹밥과 탄약을 져 날랐다.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미 그전에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인천은 군대가 상륙하기에는 악조건이 많았다. 맥아더의 참모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을 5천분의 1로 계산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본토의 증원군이 도착하더라도 강력한 인민군 3개 사단을 섬멸하기에는 희생이 너무 클 것이고, 그것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을 탈환하면 인민군은 남북 두 전선에서 전쟁을 해야 하며, 보급선을 차단당할 것이고, 인민군에게 심리적으로 절망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인천은 유엔군의 모루이고, 미8군 사령관 월튼 워크는 인민군을 마음껏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고 트루먼에게 보고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확신했다. 말하자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장사상륙작전을 전개 양동작전으로 적을 기만하고 최전선의 인민군 지원부대를 묶어 놓겠다는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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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심모원려한 장사상륙작전은 인천 상륙 작전 하루 전날인 1950년 9월14일에 전개되었다. 2급 기밀이었던 장사상륙작전은 육군참모총장의 지시에 당시 육본 작전국장이었던 강문봉 대령이 지휘했고, 이명흠 대위가 부대장을 맡았다. 우선 1950년 8월에 대구와 밀양에서 학도병을 모집하였다. 이제 15세에서 18세까지 학생들이 교복 차림에 교모를 쓰고, 그 한국 소같이 맑은 눈을 가진 청소년들이 자원해서 군문에 들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손위의 청년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간 후였다. 1950년 8월27일 밀양에서 772명의 학도병을 주축으로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명부대)'를 명칭으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밀양에서 5일간 유격훈련을 받고, 9월1일 부산으로 이동해 다시 9월9일까지 유격훈련을 받았다. 1950년 9월10일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가 발행되고, 이틀 뒤인 9월12일 보급품을 분배받고, 작전 수행의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인 13일 문산호에 승선, 부산항을 출발하여 밤새 항해 14일 새벽 4시경에 장사상륙작전을 개시했다. 그때 LST 문산호가 좌초되었고, 소수의 희생이 있었으나 장사 상륙에 성공, 전방의 200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제 인민군의 후방 주요 보급로를 차단한 셈이다. 이에 놀란 김무정의 동부 전선 인민군 제2군단의 예하 부대가 탱크 4대를 앞세워 유격대를 치러 북상해 왔다. 그래서 9월16일에서 18일까지 3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9월19일 상부의 명령에 의해 구조선 조치원호로 철수 귀환하였다. 작전 기간 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 당하는 인명 손실이 있었지만, 적 270명을 사살하고 학살 직전 애국청년 10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들 유격부대 학도병들은 모두 구국의 영웅이었다. 그 학도병들이 흘린 피와 희생, 조국의 제단에 바친 그 붉은 넋을 기리고자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 조성되었다.

글=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kc12taegu@hanmail.net
사진=백계분 여행사진 작가

☞문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054)730-7351~ 7
☞내비주소 : 경북 영덕군 남정면 동해대로 3560(장사리 100-1)
☞트레킹 코스 : 장사 해수욕장-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문산호 호국전시관
☞인근의 볼거리: 달산 옥계계곡, 산성계곡, 신돌석 장군 생가, 영덕 블루로드, 포항 보경사, 칠보산, 강구항, 삼사공원, 축산항, 동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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