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봉투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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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04 06:39  |  수정 2023-05-04 06:47  |  발행일 2023-05-04 제23면

촌지(寸志)는 말 그대로 '손가락 한 마디 되는 아주 작은 성의'를 일컫는다. 오래전 관공서·학교·언론계 등에서 촌지가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30년 전쯤이었을까. '방과 후 활동' 취재를 위해 대구 외곽지 한 초등학교에 들렀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내게 교장 선생님이 '하얀 봉투'를 건넸다. 극구 사양했지만, 그는 "진실로 작은 마음"이라며 내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봉투 겉면엔 '거마비(車馬費·교통비)'라고 적혀 있었다. 돌아오는 길 버스 맨 뒷좌석에서 봉투를 열어 봤다. 1천원권 지폐 세 장이 들어 있었다. 얼추 당시 자장면 세 그릇 값이다. 사전적 의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그야말로 '촌지'로 여겼다. 필자의 부끄러운 고백이다. 하지만 아버지뻘 되던 교장 선생님이 봉투에 넣어 준 그 '마음'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봉투'의 기원은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흙 봉투'로 알려져 있다. 제왕에게 전할 문서를 타인이 볼 수 없게끔 단단히 봉한 데서 생겨났다. 이처럼 봉투엔 '은폐(隱蔽)의 심리'가 깃들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선 예로부터 '돈은 함부로 남에게 보여줘선 안 된다'고 했다. 격려금으로 통하는 '금일봉(金一封)'은 봉투에 넣어 액수를 밝히지 않는 게 상례였다. 작금의 축의·부의금도 봉투에 숨겨서 주므로 즉석에선 액수가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봉투 하면 으레 돈이 연상되며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이 정국을 흔들고 있다. "고작 300만원" "밥값 수준"이라는 야권의 망발이 공분을 사기도 했다. '봉투'를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뿌린 책임을 피할 수 없으리라.

이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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