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 심장소리] '미스 포터' (크리스 누난 감독·2007·영국 외)…맑고 아름답게, 한 폭의 수채화처럼

  • 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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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02 08:33  |  수정 2023-06-02 08:34  |  발행일 2023-06-02 제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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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불멸의 작품을 남긴 예술가들의 삶은 대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예술이란 세계와의 불화에서 탄생하는 것이라 할 정도다. 하지만 동화작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비극적인 삶으로 마치는 경우는 드물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조화롭고 건강하게 산 경우가 많다. '미스 포터(Miss Potter)'는 저명한 그림책 작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토끼 '피터 래빗'을 만든 비어트릭스 포터(1866~1943)의 이야기다.

19세기 영국, 서른이 훌쩍 넘어도 결혼은 관심이 없고,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하는 비어트릭스는 집안의 근심거리다.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이야기로 책을 내고 싶지만, 받아주는 데가 없다. 간신히 허락받은 출판사에서 그녀의 담당은 초보 편집자 노만이다. 노만의 진심 어린 지원과 함께 동화책은 대성공한다. 비어트릭스는 작가로 이름을 얻고, 노만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둘은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몇 달 뒤 갑작스러운 노만의 죽음은 그녀를 절망에 빠트린다. 런던 생활을 정리한 비어트릭스는 어린 시절 그녀에게 영감을 준 시골 마을로 이사한다.

가정교사의 아들을 위한 그림 편지로 시작된 '피터 래빗 이야기'는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전 세계에서 2억5천만부가 판매되었다. 피터 래빗 시리즈는 그녀에게 경제적 독립을 안겨 준다. 77세로 세상을 떠난 비어트릭스는 농장 14개와 집 20채, 4천에이커의 땅을 자연보호단체에 남겼다. 조건은 자연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국립공원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땅이다. 이곳은 현재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양지가 되었다.

마흔이 넘어서야 시골 변호사 윌리엄 힐리스와 결혼하지만, 젊은 날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은 평생의 상처였다. 죽기 전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지식과 상식으로 균형을 잡고 밤의 날아오름을 두려워 않지만, 아직 우리는 삶의 이야기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동물 그림의 작가치고는 너무 지적이고, 철학적인 말이다. 사실 그녀는 동화작가에 그친 것이 아니라, 환경운동가인 동시에 식물학자였다. 버섯균에 대한 논문을 썼으나, 당시 여성의 이름으로는 논문을 발표할 수 없어 인정받지 못했다. 어쩌면 동화작가는 자신을 세상에 알릴 유일한 길이 아니었을까.

"폭력과 섹스 없는 순수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크리스 누난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맑고 서정적이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맑은 기운이 번져 온다. 변함없이 보존된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하지만 동화처럼 천진난만하게 예쁘기만 한 건 아니다. 여자로서 꿈을 펼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던 19세기, 그 황무지에서 꿋꿋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한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앉아서 글을 쓰고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팔을 걷어붙인 채 농장 일을 하고, 양을 기르는 그녀의 모습은 건강하다. 맑고, 아름답고, 강인하게, 그녀처럼 살고 싶다고 감히 말해본다. 연기파 배우 러네이 젤위거의 연기를 통해 "다음 여행지를 우리는 모른다"며 미소 짓는 비어트릭스의 모습. 영화를 통해 본 그녀의 자취는 삶의 다음 여정을 기대하고 꿈꾸게 한다.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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