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창] 회의장 공간구조와 민주주의

  •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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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31  |  수정 2023-05-31 07:00  |  발행일 2023-05-31 제26면
회의는 민주주의 핵심으로

숙의를 위한 회의공간 중요

韓, 연설에 적합한 반원형

英, 토론 위한 스타디움형

세종시 분원은 영국식으로

[시선과 창] 회의장 공간구조와 민주주의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선거법 개정 논의가 물밑에서 바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에 진행되었던 국회 전원위원회는 예상보다 반향이 적었지만, 최근 몇 주 동안 공영방송사가 시도했던 선거법 개정 관련 '공론조사 500인 회의'는 상당히 큰 울림을 낳고 있다.

선거법 개정의 필요성, 지역 선거구의 크기 및 형태, 비례대표 의석수와 선출방식 그리고 의원정수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충분하고도 균형 잡힌 정보를 확보한 시민은 그 나름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유튜브에 올라온 공론조사 500인 회의 영상을 이번 학기 내 헌법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과 함께 지켜보았다. 그런데 정작 눈길을 확 사로잡은 것은 공론조사의 과정이나 결과가 아니라 그와 같은 숙의가 이루어지는 회의장의 공간구조였다. 가장 중요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공영방송의 메인 스튜디오가 대한민국 국회의 본회의장이 아니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본회의장을 본떠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살려서 잠시 그 공간구조를 대비해 보자.

대한민국 국회의 본회의장은 의장석을 가운데 두고 반원형으로 국회의원들의 의석이 배치되어 있다. 대개 앞자리에는 초선 의원들이 앉고 맨 뒤에는 정당 지도부나 다선 의원들이 자리를 잡는다. 회의장은 널찍하고 좌석 간격도 넓고 개별 의원들의 의자는 푹신한 소재에 360도 회전이 된다.

이에 비하여 영국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본회의장은 의장석을 가운데 두고 여야 의원들이 앉는 장의자들이 여러 겹으로 경사진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의원들의 정해진 자리는 따로 없고, 맨 앞에는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둔 채 여당의 내각 구성원들과 야당의 그림자 내각 구성원들이 토론을 벌인다. 양쪽의 맨 앞에는 국무총리와 야당 당수가 서 있다.

이렇게 간단한 대비만으로도 어느 쪽 공간이 회의에 더 나은지가 잘 드러난다. 여의도 국회의 본회의장은 초점이 아무래도 의장석 아래 누군가가 발언하는 단상에 놓여있고, 그래서인지 토론보다는 연설과 선포에 적합한 공간처럼 보인다. 의석에 앉은 의원들이 자꾸 단상 쪽을 외면하고 좌우나 뒤의 동료들과 삼삼오오 잡담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는 까닭은 어쩌면 본회의장의 공간구조 자체에 함축된 권위주의적 성격을 회피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에 비하여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본회의장은 마치 일부러라도 스타디움식으로 맞서 있는 양쪽 의석들의 맨 앞자리에 초점을 맞춘 모양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경우엔 맨 앞자리에 앉은 여당과 야당, 내각과 그림자 내각 사이의 치열한 격돌은 불가피하다. 말로 하는 격돌이 벌어지니 뒤쪽에 앉은 의원들 또한 다른 생각을 하거나 잡담을 나눌 여유가 없다.

민주주의는 선거와 회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선거는 회의에 나가 시민을 대표할 의원을 뽑는 과정이고, 회의는 그 의원들이 함께 모여 의논을 통해 결정하는 과정이다. 민주주의에는 선거도 중요하지만, 회의 역시 매우 중요하다. 선거를 아무리 잘해도 회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아무런 성과 없는 겉치레에 그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회의를 잘하기 위한 필요조건 중 하나는 회의장의 공간구조이다. 근간 세종시에 국회 분원을 짓기 위한 설계 공모가 있을 것이라는 풍문을 들었는데, 적어도 현재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회의장 구조는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예 웨스트민스터 의회를 본떠 세종시 분원에 전원위원회를 위한 공간을 따로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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