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형의 정변잡설] 억울해서 죽는다

  • 정재형 변호사
  • |
  • 입력 2023-05-31  |  수정 2023-05-31 06:59  |  발행일 2023-05-31 제26면

[정재형의 정변잡설] 억울해서 죽는다
정재형 변호사

상대방의 메시지를 비판하기보다 상대의 개인사에 엮인 윤리성을 공격하는 것이 때로는 훌륭한 전술이 된다. 하지만 이 술책은 자신의 논리가 엉성하다는 하수들의 자기 고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면 공부를 더 해야 한다.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내고 재야의 지도자였던 이병린 변호사가 '간통' 혐의로 구속된 일이 1975년에 있었다.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힌 탓에 중앙정보부가 이 변호사의 뒤를 캐고 '간통범'으로 몰아 구속한 것이다. 이 변호사는 고소취소로 곧 석방되었지만 연고가 없는 지방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기가 꺾여 버렸다. '건폭'이라는 신조어가 생긴 후 건설 현장 노동조합에 대해 전방위적인 강제수사가 벌어지고 간부들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되고 있다. 그 와중에 영장 심문을 받기 위해 강릉법원에 출석했던 노동자 한 명이 분신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인권의 보루라는 법원에서, 구속영장 청구의 부당성을 법관에게 소명하는 노력까지 포기하고 말이다.

신문에 실린 그분의 유서를 읽다가 숨이 막혔다. '억울해서 죽는다'는 망인의 죽음의 변 때문이었다. 건설 현장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돈 몇 푼 뜯어낼 요량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공갈범으로 몰린 것이 억울해서,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래전 구미공단에서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벌였다는 이유로 노조위원장과 사무장이 구속된 사건을 변론한 적이 있다. 파업은 깨지고 업무방해라는 진부한 죄목으로 구속된 주동자 둘에 대한 구속적부심이 김천법원에서 열렸다. 심문을 기다리는 피의자들에게 "비록 실정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구속되었지만 당신들의 고초만큼 동료들이 혜택을 입을 것이다. 기죽지 말라 당신들은 잡범이 아니다"라고 위로한 사람은 변호인인 내가 아니고 피의자들을 법원으로 데리고 온 구미경찰서 소속 경찰관이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도 아니고 구속되어도 몇 달만 고생하면 집행유예 정도로 끝날 사안에 목숨을 건 망인의 선택이 너무 애절하다. 생명과 바꾼 그 '억울함'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라는 허망한 질문에 대해 살아 있는 우리가 응답해야 한다. 비록 노가다판에 몸담고 있지만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 자존감마저 국가로부터 부정당한 인간이 기댈 곳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리라. 노동조합도 비판받아야 하고 부조리에 대해 국가형벌권이 발동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건 아닌 것 같다. 먼저 상대방을 건폭이라고 규정하고 생양아치로 몬 후에 공갈범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것, 이건 국가가 할 짓이 아니다.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