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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터널은 일제강점기 말 순창과 남원, 담양 지역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광복과 함께 공사가 중단되어 철로는 놓이지 못한 채 터널로 남게 되었다. |
눈 깜짝할 사이 모내기가 끝났다. 완벽한 직선으로 줄지어 서 있는 모들 사이로 하늘이 깊이 잠겨 있다. 목면이불처럼 두꺼운 흰 구름의 가장자리는 회색빛이고, 그들이 육중하게 몸을 움직일 적마다 파스텔 빛의 하늘이 아쉽게 얼굴을 내비친다. 향가 길에 들자 하늘도 들도 사라진다. 녹음이 짙은 무성한 벚나무 가로수의 터널이다. 봄날 이 길은 얼마나 웅성웅성했을까. 길가에 느긋한 실루엣의 사람들이 보인다. 대가 약수터라는 간판 아래에 물통들이 줄지어 서 있다. 대가리 향가마을로 가는 길, 약수는 옥출산에서 난다.
순창 사람 공사 강제동원…광복으로 철로 못놓은채 남아
자전거길 조성후 사진·조형물·타일그림 등 설치 새단장
일제가 남긴 또 다른 상흔 향가목교엔 투명 스카이 워크
뱃놀이 즐기던 향가유원지 일대 오토캠핑장·쉼터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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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의 남단에서 섬진강을 건너는 향가목교가 이어진다. 길이는 219m 정도로 다리 초입에 섬진강 종주 자전거길 인증센터와 간이매점, 쉼터가 있다. |
◆옥출산 향가터널
곧 향가마을 표지석과 함께 검은 아치의 굴이 보인다. 향가터널이다. 입구에 곡괭이를 든 흰옷의 농민들과 총을 든 일본 순사의 조형물이 있다. 그리고 외발자전거를 탄 커다란 요정이 터널의 꼭대기에 걸터앉아 그들을 내려다본다. 향가터널은 일제강점기 말 순창과 남원, 담양 지역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옥출산을 뚫어 일본군이 만든 것이다. 이 터널을 만드는 데 수많은 순창 사람들이 강제 동원됐다. 그러다 1945년 광복을 맞이했고 철로는 놓이지 못한 채 터널로 남게 되었다. 광복 후에는 마을을 오가는 터널로 사용되다가 2013년 섬진강 종주 자전거길을 조성하며 터널 내부를 새롭게 정비하고 조명도 설치했다. 단단한 암벽을 뚫고 만든 터널은 길이 384m,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너비다. 터널 안으로 몇 발자국 들어서 본다. 천장에 매달린 하얀 새가 빛을 향해 날개를 펼치고 있다. 조금 더 들어선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진다. 조명은 꺼져 있고 체온이 뚝 떨어진다. 어쩐지 저어한 마음으로 돌아선다.
길을 따라 터널의 남쪽 끝으로 간다. 훤히 드러난 하늘 아래 섬진강이 보인다. 마을을 관통해 보다 환한 터널 입구로 간다. 터널 앞에 노란색의 향가무인공방이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림의 주제는 자신의 꿈, 미래의 내 모습, 미래의 나에게 전하고픈 말 등 미래에 대한 상상이다. 도화지와 색연필, 크레파스 등이 준비되어 있고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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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를 향가유원지라 부른다. 예부터 시인묵객과 기생을 대동한 한량들이 뱃놀이를 즐겼던 곳으로 강폭은 약 100m다. |
그림을 그리는 일이 언제부터 이렇게 어색해졌을까.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물소리가 들린다. 벽면의 레일을 따라 타일 그림이 붙어 있다. 2018년 순창 장류축제 때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 2018년과 2019년 '꿈의 자리 그림그리기'라는 이름으로 그려진 그림들 그리고 2021년과 2022년 무인공방에서 관광객들이 그린 수많은 그림들이다. 나는 프로게이머가 될 거야, 메이크업 아티스트, 나의 꿈은 경찰관, 새와 나무와 토끼와 과일나무가 있는 꽃동산에서 웃고 있는 소녀, 돛단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소년, 꼬불꼬불한 길 앞에 서 있는 아이의 뒷모습 등 모르는 이웃들의 꿈들이 내 곁에 펼쳐진다. 꿈이 담긴 그림타일은 레일 위를 채우며 매년 20m씩 달리고 있다. 앞으로도 관광객들이 남긴 그림들로 타일을 제작해 매년 꿈의 자리를 완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림이 끝나자 조명도 사라진다. 물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똑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커진다. 순창의 옛 사진들이 걸려 있다. 1969년의 간이 상수도, 1970년의 마을 공동 우물, 1972년의 초가지붕 개량. 반세기 전의 세상이 아직은 낯설지 않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자전거 길로 조성되었지만 오늘 자전거 탄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이따금 천장까지 가지를 뻗은 하얀 나무 조형물을 지나친다. 향가마을의 사계절을 담은 것이라 한다. 옥출산(玉出山)은 옥이 난다는 산이다. 이 산에는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옥을 캐면서 뚫었던 굴이 있는데, 이를 금굴이라 부르고 있다. 옥출산 자락에서 나는 약수는 철분과 미네랄이 풍부해 전북에서도 이름난 약수라 한다. 옥출산의 해발은 276.9m다. 이 작은 산이 참 많은 것들을 품고 있구나. 조금씩 밝아지며 터널의 끝이 보인다. 터널 안은 감기를 걱정할 만큼 서늘했고 되돌아 나오는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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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출산의 암벽을 뚫고 만든 향가터널의 길이는 384m, 터널 안에는 사람들의 꿈을 담은 그림타일과 향가마을의 사계절을 담은 나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
◆향가목교
터널의 남단에서 섬진강을 건너는 다리가 이어진다. 터널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던 다리는 역시 광복으로 공사가 중단되어 10개의 철도 교각만 강물 속에 박힌 채 남아 있었다. 이후 자전거 길을 만들 때 나무상판을 놓아 다리를 완성했고 이제는 향가목교라 부른다. 자전거 길은 섬진강댐에서 시작해 이곳 향가터널을 지나고 향가목교를 건너 횡탄정, 사성암, 남도대교를 지나 배알도수변공원에 이른다. 총 149㎞나 된다. 다리 초입에 섬진강 종주 자전거길 인증센터가 있고 간이매점과 꽃 화분이 잔뜩 놓인 쉼터가 있다. 다리가 넓다. 길이는 219m 정도다. 또각또각 발바닥이 편안하다.
목교 중간에 투명 강화 유리 바닥의 스카이 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날카로운 삐걱 소리에 소름이 돋는다. 프레임을 조심조심 밟으며 반원의 꼭짓점에 선다. 옥출산 아래의 향가마을이 보인다. 마을은 300여 년 전 진주강씨(晉州姜氏)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 향가(香佳)는 섬진강을 향기로운 물(香水)이라 하고, 옥출산을 가산(佳山) 즉 아름다운 산이라 하여 한 글자씩 따 만들어진 이름이다. 향가마을에는 자전거길 조성을 전후해 만들어진 오토캠핑장이 있다. 캠핑 데크가 42면, 방갈로는 6개동, 카라반 6대가 있고 생태 연못과 자전거 쉼터, 정자, 등산로와 산책로 등 마을 전체가 건강 휴양 체험 지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일대를 향가유원지라 부른다. 예부터 시인묵객과 기생을 대동한 한량들이 뱃놀이를 즐겼던 곳이라 한다. 강폭은 약 100m다. 섬진강물을 따라 야트막한 산이 이어져 있고 강변에는 약 2㎞ 정도의 백사장이 넓게 펼쳐진다. 어제의 비로 섬진강 물은 흙탕물이고 백사장은 잠겨버렸지만 먹먹히 아름답다는 것은 알겠다. 강변에 낚시꾼이 있다. 가을에는 제법 씨알이 굵은 돌붕어가 잡힌다는데 오늘 저 막막한 물빛 속에서는 무엇이 잡히려나. 간이매점 앞 쉼터에 두 남자가 작은 버너를 사이에 두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다. 의자에 누운 늙은 강아지는 "안녕" 인사를 하여도 꼼짝없이 눈만 끔뻑인다. 메뉴판에 쓰인 붕어싸만코, 부라보콘, 누가바, 돼지바, 삐삐코, 비비빅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터널의 냉기와 강바람의 축축함이 아직 짙으니 음… 생강차를 마셔야겠다. 라면은 셀프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순창IC로 나간다. 순창IC교차로에서 3시 방향으로 우회전, 300m 정도 직진한 후 27번국도 전주, 남원 방향으로 간다. 향가교차로에서 12시 방향으로 직진, 곧바로 나타나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된다. 향가마을 표지석이 있는 향가터널 북단을 지나면 오토캠핑장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고 향가산장 쪽으로 가면 노란색 무인공방이 있는 향가터널 남단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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