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의 삶의 공간이야기] 스승의 날, 오산당을 찾아…겹겹의 창호로 자연·수학 함께 즐길 수 있어…전통·생태적 건축의 근본

  • 김경호 아삶공 생태건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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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09 07:42  |  수정 2023-06-09 07:43  |  발행일 2023-06-09 제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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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전 안동문화원장의 특강이 진행되고 있다.

스승의 날을 맞아 퇴계 선생께서 즐겨 찾아 수학(修學) 하셨던 오산당(吾山堂)을 찾아 나섰다. 도산서원을 지나 청량산(淸凉山) 초입에 이르니 퇴계 선생의 시(詩)가 자연석에 음각(陰刻)되어 있다.


讀書如遊山 독서여유산

讀書人說遊山似 독서인설유산사

今見遊山似讀書 금견유산사독서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진시원자하

淺深得處摠由渠 천심득처총유거

坐看雲起因知妙 좌간운기인지묘

行到源頭始覺初 행도원두시각초

絶頂高尋勉公等 절정고심면공등

老衰中輟愧深余 노쇠중철괴심여



사람들 말하길 글 읽기가 산 유람함과 같다지만

이제 보니 산 유람함이 글 읽기와 비슷하구나.

공력을 다했을 땐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깊고 얕음 아는 것 모두 저로부터 말미암네.

앉아서 피어 오르는 구름 보며 묘리를 알게 되고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높이 절정을 찾아간 그대들에게 기대하며

늙어서 중도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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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서헌에 앉아서 보이는 담장


기록에 의하면 퇴계 선생께서 15세 때 청량산에 처음 오셨다고 한다. 당시 강원도 관찰사였던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우)선생이 그의 아들과 조카, 사위들을 청량산에 보내어 독서하도록 명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송재 선생이 그들을 보내면서 십절(十絶)의 시(詩)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 중에는 '나도 일찍이 십년간 그곳에서 형설(螢雪)의 공을 닦았노라(我曾螢雪十年間)'고 하신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송재 선생의 청량산 입출명의 뜻은 선조의 학습장이었고 또 자신의 수련장이던 청량산이 지니고 있는 웅대하고 곧은 기상을 후대에 물려주어 자연과 더불어 독서(讀書) 수도(修道)할 것을 권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퇴계 선생과 청량산의 관계는 시작되었고 평생에 걸친 인연(因緣)이 되었다고 한다. 뒷날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지은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 대하여 퇴계 선생께서 지으신 발문(跋文)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적고 있다. '안동부의 청량산은 예안현에서 동북쪽으로 시오리 거리에 있다. 나의 집은 그 거리의 반쯤 된다. 새벽에 떠나서 산에 오를 것 같으면 해가 오시(午時)가 못되어서 배가 오히려 꺼지지 않고 불룩한 것 같으니 이는 비록 지경은 다른 고을이지만 이 산은 실지로 내 집의 산(吾家山)이다.'

퇴계선생, 청량산 즐겨 찾아 학문 수양
낙동강 내려 보이는 곳에 도산서당 조성
철종때 영남유림 600명 강회한 오산당
창호 따라 매시 변하는 풍경 감상 가능
청량정사, 현재 전선줄 등 보여 아쉬워
주변과 문화재 조화시키는 법 고민해야


퇴계 선생이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서책(書冊)을 짊어지고 이 산에 왕래하면서 독서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렇듯 퇴계 선생께서는 그의 인격적 만남의 '첫 스승'이 송재 선생이었다면 그분의 분부(吩咐)로 만난 '첫 자연'이 청량산이었다는 점에서 이때의 산행은 선생에게 커다란 감동과 각오를 주었을 것이다. 선생께서 55세 때 11월에는 한 달 동안 이 산에 머물면서 유산서사십이수(遊山書事十二首)를 짓기도 하셨다. 이 외에도 선생께서 48세 때 단양군수로 재임 시 그해 5월에 단양 산수의 절경을 돌아보시고 단양산수가유자독기(丹陽山水可遊者讀記)를 지었고 이듬해 49세에는 풍기군수로 그해 5월에 소백산을 답사하고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을 지으셨다고 한다.

어릴 적 외조부로부터 퇴계 선생 일대기의 말씀을 자주 듣고 자랐고 그 때 청량산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던 바 오늘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께서 수학하셨던 청량산에 오르게 되니 여느 산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지고 오르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주변의 돌 하나 풀 하나가 선명하게 와 닿았다.

선생은 세계적인 훌륭한 학자이기도 하지만 필자에겐 존경받는 조영가(造營家)이기도 하다. 건축(建築)과 조경(造景)을 전공하였지만 선생의 깊은 철학과 그 사상으로 지어진 건축과 조경, 경영(經營)을 배움에 한참 부족함을 알고 있다. 선생께서 지으신 집들을 살펴보면 30세에 두 번째 부인 권씨 부인을 맞이하고 이듬해 지산와사(芝山蝸舍)를 짓고 15년을 살다가 46세에 퇴계의 동쪽 바위 가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양진암은 서까래 3개만 사용하는 조촐한 집이었고 조그만 채전(菜田)을 갈고 주위의 청산으로 문호(門戶)를 삼고 골짜기에 흐르는 냇물을 노래하는 앞뜰로 삼았다. 집 앞에 흐르는 냇가를 깨끗이 손질한 후 퇴계(退溪)라 이름 짓고 아호(雅號)로 삼았다. 양진암에 거처한 기간은 2년이 채 못 되지만 향후 교육과 학문을 수양함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는 집으로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1550년 다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퇴계 서쪽에 살 곳을 정하여 거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지어진 한서암(寒棲庵)에는 조그만 연못과 둘레에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오이를 심고 학자로서 학문과 수양에 한층 전념하는 자세를 보이셨다. 오이를 심은 이유는 책을 읽을 때 목이 많이 말랐고 그 때에 오이만큼 고마운 것이 없다고 하셨다. 이듬해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게 되는 데 규모는 10여 칸으로 온돌이 없었다. 처음으로 후학들을 위한 강당이생겼고 이 때에 35살이나 나이 차이가 있는 새파란 젊은 학자 율곡 이이를 만나게 된다. 2박3일간의 머무름 속에 퇴계는 율곡을 벗이라 칭하고 율곡은 퇴계를 평생 스승으로 섬겼다고 하니 장소가 갖는 역사적 만남은 그렇게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주변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를 옮겨 심고 연(蓮)과 함께 여섯 벗이라는 육우원(六友園)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공간이 협소하고 제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낙동강이 내려 보이고 들판이 펼쳐져 전망이 트인 자리로 서당을 옮기게 되는데 이 곳이 바로 세계적 조영공간인 도산서당(陶山書堂)이다. 도산서당은 3간으로 규모는 작지만 당(堂), 재(齋), 헌(軒)의 기본구조를 갖추었고 방당(方塘)의 못과 샘이 있었고 사립문과 낮은 담을 두어 자연과의 소통과 교류가 명쾌하였고 선생의 철학이 온전하게 집약되면서 디자인된 공간이었다.

찾을 때마다 느끼지만 지금의 건축되는 건물(建物)과는 격이 다른 조영(造營)의 품위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필자의 깊은 아쉬움은 그 시대로 거슬러 선생께서 작업하신 조영을 오롯이 엿볼 수 있도록 사립문과 같은 키높이로 토담을 낮추고 서원의 담벼락도 낮추고, 방당도 접근할 수 있는 규모와 크기로 복원하여 암서헌에 앉으면 시선이 낮은 토담을 넘어 서원의 담을 건너 낙동강까지 내려 볼 수 있도록 하고 방당의 연꽃도 잘 보이도록 하고 싶다. 동시대에 살지는 못했지만 살평상에 아이들이 앉아서 "아 퇴계 할아버지는 옛날 이런 곳에서 이런 자세로 이런 자연을 접하시면서 공부도 하고 삶을 사셨구나!" 그래서 '거경궁리(居敬窮理)'라는 말씀이 영어단어처럼 외워야 하는 단어가 아니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생활 속의 문장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필자의 소견이다.

지금은 마루에 앉으면 키 큰 금송(金松)은 옮겨졌으나 성역화 작업을 하면서 과(過)하게 쌓아놓은 높고 묵직한 기와 담장이 시선을 가리고 마음까지 답답하게 하니 선생께서 누렸을 주변 공간과의 감응을 충분히 읽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매년 모임을 가져왔던 오산당계회(吾山堂契會)는 2019년 5월 이후부터 코로나의 확산으로 개최하지 못하다가 올해 첫 모임을 가지는 자리였다. 상호인사와 새로운 신입회원의 소개가 끝나고 전 안동문화원장을 지낸 이동수 원장의 특강이 이어졌다. 퇴계 선생을 추모하고 그 뜻을 이어 거경궁리(居敬窮理) 하는 자세를 확인하고 다짐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필자로선 자세를 바로 하게 되고 마음가짐도 단정하게 갖추었다.

선생께선 책을 짊어지고 오르셨지만 가벼운 차림으로 휴대폰 하나 들고 오르면서도 숨이 차서 헐떡거렸던 생각에 스스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오산당강록(吾山堂講錄)에 의하면 1850년 철종 때 영남유림 600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의 강회를 오산당에서 열었고 3일간 워크숍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오늘 모인 20여 명과는 너무 차이가 나서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지만 그 당시 병호시비로 문제가 된 영남의 유림을 단결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암튼 오늘은 오산당의 뒤뜰 툇마루에 올라 특강을 경청하고 메모도 하고 있는 지금이 행복했다.

강의를 듣는 도중 보이는 겹겹의 창과 문, 그리고 그 창호(窓戶)의 열고 닫힘을 통해 멀리 있는 자연을 곁으로 당겨와 일상을 함께 즐기는 오산당(吾山堂) 공간의 기법은 지혜로웠다. 사계절 자연의 변화와 창호의 조작 방법에 따라 매시 변화하는 풍경을 무한히 그리고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점은 자연을 소유(所有)하기보다는 우주 안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를 겸허히 수용하고, 자연을 주체성을 지닌 상대로 인정하며 생활 속에서 상호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전통적이고 생태적 건축의 근본개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청량산의 기운을 오산당으로 들이고 나는 깨달음을 내뱉으니 자연과 호흡하며 이치를 깨닫게 된다." 필자가 느끼는 심정을 한자어로 표기하지 못하겠지만 그때의 기쁨은 그러하였다.

어쩌면 지금 시대에서 누구에게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뒤처진 질문으로 들릴 수 있다. 인공지능 GPT가 나오고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차고 넘친다. 교수나 선생의 자리는 학생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존엄(尊嚴)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학생이 선생을 넘보고 선생은 학생을 경계하는 지금의 학풍은 안타까움을 넘어 절망감까지 이르게 한다.

청량정사(淸凉精舍)는 주사(廚舍) 여섯 칸과 강당(講堂) 십칸(으로서 강당의 당(堂)은 오산당(吾山堂)이요, 헌(軒)은 운서헌(雲栖軒)이요, 요(寮)는 지숙요(止宿寮)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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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아삶공 생태건축연구소 소장

오산당(吾山堂)에서 보여지는 전선줄은 눈에 거슬렸다. 전선줄만 없었다면 그 시간으로 돌아가 선생께서 자연을 바라보실 때의 심상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현판옆에 달려있는 말벌집만한 등(燈)도 보기에 불편하다. 대들보에 걸려있는 백색의 플라스틱 전등도 어색하다. 공간을 다루는 필자의 눈에는 그런 것만 먼저 들어온다. 함께 자리를 같이 한 백랑형과 조금씩 손을 보면 어떨까 제안을 해 본다. 흔쾌히 함께 하자는 말씀에 어깨가 으쓱거렸다.

지숙요(止宿寮)의 내부는 전기장판으로 깔려 있다. 지숙요안에는 책 한 권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음은 필자만의 감정인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바닥온돌에 종이 장판으로 마감을 하고 선생께서 주로 읽으셨던 책들을 비치해 놓고 싶었다.

주사(廚舍)는 지금의 주방과 같은데 옆지기 시인이 살고 있었다. 정사의 관리를 도맡아 하시며 모임이 있을 때 마루를 쓸고 닦으시고 오솔길의 풀도 정리해 주셨다. 참 고맙고 중요한 분이시라 다시 뵙기로 약속하고 산을 내려왔지만 주사의 지붕이 붉은 기와로 되어있어 청량정사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주변의 환경에도 유달리 눈에 띄어 보기에도 참 불쾌하였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문화재 일정 반경 주변의 건축물은 지붕을 기와로 해야 허가를 득한다는 사실이 통상화되고 있다. 어설픈 형태를 따라하기보다 차라리 평지붕을 하더라도 주변과 어떻게 조화로울 수 있는가에 따른 문화환경적 안목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형태를 규정하고 물리적인 방법으로만 문화재를 보존하고 보호한다면 문화재는 문화의 재산이 아니라 갇혀 있는 창고의 물품으로 전락될 수 있다.

임진왜란 때에 왜놈의 방화로 소실(燒失)되었다가 구한말에는 의병의 근원지가 되어 또다시 소멸되는 아픔이 있었다고 한다.

학자들이 학문의 종말에는 노래로 매듭짓는 경우가 많다. 선생께서도 말년에 도산십이곡을 쓰셨다. 철학가, 조영가를 넘어 음악가로 나서시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만약 선생께서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아마도 곡을 많이 쓰셨을 것 같다. 도산십이곡을 지으시고 배우고 스스로 깨친 바를 후학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가장 편하고 쉽게 배울 수 있는 곡을 지으셨을 것이다.

원고를 쓰고 보니 대부분의 내용은 그날 오산당에서 듣고 적었던 내용이고 이동수 원장이 나눠주신 자료를 베끼다시피 한 내용임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고 중(重)한 공간이기에 함께 배우기도 하고 함께 실천하기도 싶은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며 졸필을 마친다.
아삶공 생태건축연구소 소장 a30cok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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