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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으로 향하는 오솔길 끝에 고마나루가 있었다. 강 건너 산은 연미산이다. 고마나루 일대는 명승 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공주 땅의 시원이 되는 아주 오래된 전설이 전해진다. |
그늘 짙은 솔숲 사이로 환한 모랫길이 너르다. 이편의 솔숲 너머에는 금강이 흐르고 저편의 솔숲 너머에는 백제큰길이라 부르는 도로가 흐른다. 그러나 강물소리도 자동차소리도 솔숲을 뚫지 못하고 시간은 멈춘 듯 천지가 적막하다. 그늘이 짙어도 길가의 숲이란 빛이 드나들기 좋아서 잡풀이 왕성하다. 작고 빨간 뱀딸기가 잔뜩 흩뿌려진 풀숲으로 모래 빛깔의 가느다란 뱀이 성급히 제 그림자를 지우며 달아난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쿵쾅거리는 재바른 걸음이 벤치에 앉은 맨발의 부부를 지나친다. 그들의 형형한 눈빛이 뒤통수에 꽂힌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
웅진백제 관문…中·일본·고구려와 교역하던 국제항구
조선후기 조성된 450여 그루 솔숲 곳곳 곰 조형물 놓여
향교 대성전 본떠 만든 곰사당엔 소박한 돌곰 상 모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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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나루 가는 길. 왼편의 솔숲 너머에는 금강이, 오른편의 솔숲 너머에는 백제큰길이라 부르는 도로가 흐른다. 고마나루 솔밭은 금강 6경이다. |
◆고마나루
솔밭 끝자락에 반짝거리는 금강과 강변의 모래밭이 펼쳐진다. 동쪽에서부터 흘러온 금강이 거의 직각으로 꺾여 남쪽으로 향하는 자리다. 빠른 물살이 만들어지는 지형이지만 금강은 소리도 없이 가만 누운 듯 보인다. 지척에 가로 서 있는 공주보로 인해 강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강변의 풀숲을 헤치며 좁은 오솔길이 강을 향해 간다. 저 오솔길 끝에 고마나루가 있었다. 나루터에서 강을 건너 이어지는 나지막한 산은 연미산(燕尾山)이다. 고마나루와 연미산에는 아주 오래된 전설이 걸쳐져 있다.
옛날 연미산에 암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연미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곰에게 잡히고 말았다. 곰은 남자를 동굴로 데려가 남편으로 삼았다.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곰은 항상 커다란 돌로 동굴의 입구를 막아 놓았다. 그리고 매일 물고기를 잡아와 나누어 먹었다. 시간이 흘러 곰과 남자 사이에 두 아이가 태어났다. 곰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가진 모습의 아이들이었다. 곰은 이제 그가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동굴의 입구를 열어 두었다. 그 사이 남자는 도망쳤다. 쉬지 않고 노를 저어 강을 건넜다. 뒤늦게 쫓아간 곰은 새끼를 들어 보이며 돌아와 주기를 애원했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슬픔에 몸부림치던 곰은 끝내 새끼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남자가 강 건너 도망간 곳이 고마나루다. 고마는 곰의 옛말로 고마나루는 곧 곰나루이고 한자로 웅진(熊津)이다. 웅진은 공주의 옛 지명이고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다. 웅진기 백제의 역사가 고마나루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고마나루는 왕성의 관문이었고 중국과 일본, 고구려 등과 문물을 교역하던 국제 항구였다. 백제 동성왕 시대에 금강이 넘쳐 200여 호가 물에 잠겼다는 기록이 있다. 1945년에는 큰 장마가 져 고마나루 일대의 모래가 쓸려 나갔는데 그 자리에 가로 세로로 쌓은 건물의 흔적이 드러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일대에 아주 커다란 마을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공주에서는 지금도 금강을 웅진강이라 부른다.
연미산을 마주 보는 고마나루 언덕에 까만 비석이 서 있다. 웅진단(熊津檀) 터를 알리는 비석이다. 이곳에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주관으로 제사가 행해졌었다. 처음에는 곰에 대한 제사였으나 점차 수신(水神)에 대한 제사로 성격이 변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곰에 대한 제사라고 생각했고 곰이 좋아하는 도토리묵과 마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고마나루 전설은 유난히 슬프다. 비석이 너무 까매서, 강물이 너무 조용해서, 연미산의 솔숲이 너무 우거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전거 헬멧을 쓴 남자가 뒤편 솔숲에서 쓱 나타나더니 흠칫 놀란다. 도망친 남자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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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나루 언덕의 웅진단 터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에서 금강의 수신에게 제사 지내던 곳이다. |
◆솔숲의 곰사당
솔숲으로 들어간다. 금강은 이리저리 몸을 기운 소나무 줄기에 쓱쓱 베어져 이내 보이지 않는다. 고마나루 솔숲에는 450여 그루의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나무들은 무척 건강한 모습이다. 솔가리 수북한 나무 밑에 한 사람이 돗자리도 없이 곧게 누워 잠들어 있다. 환영 같던 뱀보다도 더욱 오싹 놀랐다. 솔숲의 오솔길을 따라 띄엄띄엄 곰 조형물이 놓여 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이제는 즐거운 듯도 보인다. 곰과 새끼들이 강물 속으로 사라진 뒤 강에는 풍랑이 자주 일었다고 한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잦아지자 사람들은 곰의 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나루터 인근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하늘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나란히 걸어온다. 남자는 고마나루에 대해 설명하느라 목소리가 높고 여자는 아무 말이 없다. 그들 뒤로 낮은 담을 두른 곰사당이 보인다. 오래전에 있었다는 사당은 모르는 사이 사라졌고 지금의 곰사당은 근래에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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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숲의 곰사당. 곰의 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며 오늘날에도 제를 올리고 있다. |
곰사당은 조선 시대 향교의 대성전을 본떠 지었다. 정면 2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렸고 현판에는 웅신단이라 쓰여 있다. 활짝 열려 있는 문 속으로 단 위에 모셔놓은 돌곰 상이 보인다. 곰 상은 몸 뒤쪽을 웅크리고 앞다리는 곧추세워 머리를 괸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데 단순한 형태에 소박하고 귀여운 모습이다. 1972년에 공주 송산리 고분군 인근에서 백제 유물로 추정되는 돌곰 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무령왕릉 맞은편 남쪽 구릉의 경사면, 즉 지금 곰사당이 자리한 곳이다. 돌곰 상은 높이 34㎝, 폭 29㎝ 크기에 화강암으로 제작된 것으로 현재 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곰사당의 곰은 그 돌곰 상을 본떠 만들었다. 뜰에는 고마나루 전설을 새겨놓은 '웅신단비'라는 비석이 있다. 커다란 바위의 비신을 받치고 있는 아랫돌의 모습이 철퍼덕 넘어진 곰 같다.
주몽의 아들 온조가 부여계통의 이주민들과 함께 한강 유역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운 때가 기원전 18년이다. 그로부터 수백 년간 번성했던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475년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고마나루 전설은 무려 1천500여 년간 전해지고 있다. 강을 건너 도망쳐야 했던 남자, 남자를 원망하며 강에 몸을 던진 곰. 공주라는 이름에는 죽음으로 끝난 이야기가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사랑이나 인연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운명 또는 천명에 대한 것으로 느껴진다. 백제는 660년 멸망했고, 솔숲의 입구 쪽으로부터 수많은 중년 남녀가 우르르 시끌벅적 사당을 향해 오고, 이제 오늘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강을 건너야겠다.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으로 가다 대전 지나 회덕 분기점에서 당진, 세종 방향으로 나간 후 유성 분기점에서 30번 당진영덕고속도로 당진방향으로 가다 공주IC로 나간다. 공주IC교차로에서 공주보 이정표 따라 우회전하면 백제큰길에 들어선다. 백제큰다리를 건너고 정지산 터널을 지나 계속 직진, 곰나루교차로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명승 고마나루'의 작은 주차장이 있다. 화장실과 쉼터 가운데 숲길로 들어가면 곰사당, 화장실 왼편 솔숲 가운데의 널찍한 모랫길을 따라가면 고마나루 전망대와 웅진단 터가 나란히 있다. 곰사당 뒤편 솔숲 오솔길로 가도 고마나루 전망대로 갈 수 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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