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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에서 본 산과 운해의 파노라마. |
"…정선 읍내 일백오십 호 몽땅 잠 들여놓고서, 이호장 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 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수수밭 삼밭을 다 지내놓고서, 빤빤한 잔디밭에서 왜 이렇게 졸라. 아우라지 건너갈 때는 아우라지더니 가물재 넘어갈 때는 가물 감실하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 아라리는 가장 늘어지게 부르는 긴 아라리, 이보다 경쾌하게 부르는 자진 아라리, 앞부분은 사설로 엮어 나가다가 나중에 늘어지게 부르는, 즉 아라리의 가락으로 되돌아가는 엮음 아라리가 있다. 아라리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시누야 올케야 말 내지 말게 삼밭 속의 보금자리는 내가 쳐 놓았네. 간난 아버지 길 떠나신 줄은 번연히 알면서 간난 아버지 어데 갔느냐 묻기는 왜 묻나. 정선읍내야 백모래 자락에 비오나 마나, 어린 가장 품 안에서 잠자나 마나. 개구리란 놈이 뛰는 뜻은 멀리 가자는 뜻이요, 히쓱 해쓱 웃는 뜻은 정주자는 뜻이라. 우리야 연애는 솔방울 연앤지, 바람만 간시랑 불어도 똑 떨어진다. 기름불 꺼질라고 가물 감실하는데, 기름 수대 가지러 간 년에 그대 당신 죽었네. 시어머니 산소를 까투리 봉에 썼더니, 아들딸 낳는 쪽 쪽 콩밭 골로 가네. (후렴)"
정선 아라리는 긴 음이 없고, 최고 음과 최저 음의 음폭이 작아 선율의 변화가 미미하다. 이러한 것은 리듬보다 아라리 가사에 중점을 둔 것으로, 가사 속에는 첩첩 산속에 묻혀 사는 한탄, 세상을 등진 신세타령, 산골로 시집보낸 부모에 대한 원망, 살아가는 일의 덧없음, 남녀의 애틋한 사랑, 은밀한 불륜의 애정, 시부모의 간섭에 대한 저항 등 노래의 내용이 다채롭고 해방감이 있다. 그중에도 같은 또래가 산속에서 꼴을 하거나 나물을 뜯거나, 노는 자리에서 은밀히 불렀다는 어리거나 나이 든 남편과의 성적 불만, 총각 처녀의 탈선적인 애정 행위, 유부녀 유부남의 외도 등 빗나간 성행위를 내용으로 한 노골적인 아라리가 뜻밖에도 한 줄기를 이뤘는데, 이 노래들이 비천하거나 추잡하기는커녕, 도리어 싱싱하고 살아있는 생명력으로 넘쳐나는 밝고 감동적인 노래였다. 정선에 사는 누구라도 돌려 가면서 부를 수 있고, 밭매면서, 소먹이 하면서, 나물 뜯으면서, 나무를 하면서 흥얼거리는 노래는 정선 아라리뿐이었다. 정선 아라리는 그만큼 쉽고, 내용이 가슴에 닿고, 부르면 부를수록 새로운 흥이 아라리 가락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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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 가리왕산 케이블카. |
케이블카가 고도를 높여간다. 고산 숲이 수해를 이루고 있다. 근데 이 무슨 조화냐. 산 중턱부터 안개가 자욱하다. 그 짙은 안개 속으로 케빈이 오른다. 안개 낀 허공으로 상승하는 긴장감에 나는 나의 다른 상(像)이 떠올라 당황했고, 내 안의 무언가가 불쑥 나타나 나에게 마구 함성을 질러댔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나를 가파르게 끌고 왔던 호흡들을 뚫고 바야흐로 기억들이 날아올라 날개를 파닥이는 안개 속의 나여, 자기여. 애면글면 나는 누구인가. 상부 승강장에 도착한다. 가시거리가 짧아 더듬거리며 데크길로 나와 전망대를 걷는다. 그러나 안개는, 시간이 유령으로 나타난 것이다. 저 안개 속으로, 그 너머로 가리왕산의 풍경이 신비하게 피어나고, 그 무대 뒤에 숨어버린 기억들이 다시 운무와 산의 실루엣으로, 산 그리메를 그리며 살아나는 것이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먼 미래로 흘러가면서, 한 세상의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기억에서 운무에 덮인 신화의 가리왕산이, 마르크 샤갈의 몽환적인 화폭처럼 클로즈업되는 것은, 그 기억이 미래로 흘러가면서 터치한 상상의 블랙홀에 홀딱 빠져버린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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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오일장의 번잡한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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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아리랑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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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
글=김찬일<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유판도 여행사진작가
☞문의: 정선 가리왕산 케이블카 (033)560-3467
☞내비 주소: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 산 400
☞트레킹 코스: 가리왕산 하봉 정상 전망대 둘레길, 정선 오일장
☞인근의 볼거리: 하이원 리조트, 화암동굴, 스카이워크, 집와이어, 정선레일바이크, 아우라지, 아라리촌, 정암사, 만항재, 오장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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