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정선 가리왕산·오일장 트레킹···깊은 골마다 아리랑 구슬픈 가락 절절하구나

  • 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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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16  |  수정 2023-06-16 08:27  |  발행일 2023-06-16 제38면
'아리랑의 고장' 강원 정선 가리왕산

케이블카로 20분 하봉 정상에 오르면

운무로 덮인 산 실루엣에 감탄사 연발

끝자리 2·7일마다 열리는 '정선오일장'

전국 각지서 온 관광객으로 시끌벅적

별식 천지 민속장터 웃음소리 정겨워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정선 가리왕산·오일장 트레킹···깊은 골마다 아리랑 구슬픈 가락 절절하구나
가리왕산에서 본 산과 운해의 파노라마.
정선 하면 정선 아라리가 메타포다. 그때 관광버스 앞 화면에는 정선 아라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정선 가리왕산, 오일장 트레킹 가는데 정보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달덩이 같은 얼굴에, 다감한 표정으로 아라리를 부르는 명창의 이름을 지금은 잊었지만, 그분의 아라리 노래는 한과 슬픔을 뿌리면서 동강의 물처럼 구성지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아라리는 타지방 아리랑보다 비교적 느리고 단조로운 9/8 박자로 불리고, 그 노랫말 알레고리는 이러했다.

"…정선 읍내 일백오십 호 몽땅 잠 들여놓고서, 이호장 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 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수수밭 삼밭을 다 지내놓고서, 빤빤한 잔디밭에서 왜 이렇게 졸라. 아우라지 건너갈 때는 아우라지더니 가물재 넘어갈 때는 가물 감실하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 아라리는 가장 늘어지게 부르는 긴 아라리, 이보다 경쾌하게 부르는 자진 아라리, 앞부분은 사설로 엮어 나가다가 나중에 늘어지게 부르는, 즉 아라리의 가락으로 되돌아가는 엮음 아라리가 있다. 아라리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시누야 올케야 말 내지 말게 삼밭 속의 보금자리는 내가 쳐 놓았네. 간난 아버지 길 떠나신 줄은 번연히 알면서 간난 아버지 어데 갔느냐 묻기는 왜 묻나. 정선읍내야 백모래 자락에 비오나 마나, 어린 가장 품 안에서 잠자나 마나. 개구리란 놈이 뛰는 뜻은 멀리 가자는 뜻이요, 히쓱 해쓱 웃는 뜻은 정주자는 뜻이라. 우리야 연애는 솔방울 연앤지, 바람만 간시랑 불어도 똑 떨어진다. 기름불 꺼질라고 가물 감실하는데, 기름 수대 가지러 간 년에 그대 당신 죽었네. 시어머니 산소를 까투리 봉에 썼더니, 아들딸 낳는 쪽 쪽 콩밭 골로 가네. (후렴)"

정선 아라리는 긴 음이 없고, 최고 음과 최저 음의 음폭이 작아 선율의 변화가 미미하다. 이러한 것은 리듬보다 아라리 가사에 중점을 둔 것으로, 가사 속에는 첩첩 산속에 묻혀 사는 한탄, 세상을 등진 신세타령, 산골로 시집보낸 부모에 대한 원망, 살아가는 일의 덧없음, 남녀의 애틋한 사랑, 은밀한 불륜의 애정, 시부모의 간섭에 대한 저항 등 노래의 내용이 다채롭고 해방감이 있다. 그중에도 같은 또래가 산속에서 꼴을 하거나 나물을 뜯거나, 노는 자리에서 은밀히 불렀다는 어리거나 나이 든 남편과의 성적 불만, 총각 처녀의 탈선적인 애정 행위, 유부녀 유부남의 외도 등 빗나간 성행위를 내용으로 한 노골적인 아라리가 뜻밖에도 한 줄기를 이뤘는데, 이 노래들이 비천하거나 추잡하기는커녕, 도리어 싱싱하고 살아있는 생명력으로 넘쳐나는 밝고 감동적인 노래였다. 정선에 사는 누구라도 돌려 가면서 부를 수 있고, 밭매면서, 소먹이 하면서, 나물 뜯으면서, 나무를 하면서 흥얼거리는 노래는 정선 아라리뿐이었다. 정선 아라리는 그만큼 쉽고, 내용이 가슴에 닿고, 부르면 부를수록 새로운 흥이 아라리 가락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정선 가리왕산·오일장 트레킹···깊은 골마다 아리랑 구슬픈 가락 절절하구나
안개 속 가리왕산 케이블카.
그 강원도 산골 중에서도 오지인 정선, 버스는 가리왕산 주차장에 시나브로 도착한다. 가리왕산은 정선의 진산이며, 산이 높고 웅장한 육산이다. 옛날 맥국(貊國)의 갈왕이 이곳에 피난하여 성을 쌓고 머물렀으므로 갈왕산이라 불리다 일제 시 가리왕산으로 고쳐 불렀다. 알파인 플라자를 지나 정선 가리왕산 케이블카 숙암역에서 승차를 한다. 가리왕산 케이블카는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알파인 스키 경기가 개최된 경기장 시설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성료되자, 2019년 1월3일 산림청은 강원도에 철거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정선 군민들이 철거 반대 운동을 하여, 2021년 6월 정부가 가리왕산 케이블카를 3년 한시적으로 운영하도록 결정하고, 2024년 12월31일까지 운영 후 존치 여부를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정선군은 2022년 12월 한 달 동안 군민의 시험 운행을 거쳐 2023년 1월3일부터 일반 관광객을 맞이하였다. 나이 든 어르신에서 어린이까지 교통약자들도 단 20분 만에 해발 1천381m의 가리왕산 하봉 정상에 올라, 천지가 탁 트여 동해까지 조망되는 뷰 포인트에서 파노라마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케이블카가 고도를 높여간다. 고산 숲이 수해를 이루고 있다. 근데 이 무슨 조화냐. 산 중턱부터 안개가 자욱하다. 그 짙은 안개 속으로 케빈이 오른다. 안개 낀 허공으로 상승하는 긴장감에 나는 나의 다른 상(像)이 떠올라 당황했고, 내 안의 무언가가 불쑥 나타나 나에게 마구 함성을 질러댔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나를 가파르게 끌고 왔던 호흡들을 뚫고 바야흐로 기억들이 날아올라 날개를 파닥이는 안개 속의 나여, 자기여. 애면글면 나는 누구인가. 상부 승강장에 도착한다. 가시거리가 짧아 더듬거리며 데크길로 나와 전망대를 걷는다. 그러나 안개는, 시간이 유령으로 나타난 것이다. 저 안개 속으로, 그 너머로 가리왕산의 풍경이 신비하게 피어나고, 그 무대 뒤에 숨어버린 기억들이 다시 운무와 산의 실루엣으로, 산 그리메를 그리며 살아나는 것이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먼 미래로 흘러가면서, 한 세상의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기억에서 운무에 덮인 신화의 가리왕산이, 마르크 샤갈의 몽환적인 화폭처럼 클로즈업되는 것은, 그 기억이 미래로 흘러가면서 터치한 상상의 블랙홀에 홀딱 빠져버린 탓일 것이다.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정선 가리왕산·오일장 트레킹···깊은 골마다 아리랑 구슬픈 가락 절절하구나
정선 오일장의 번잡한 풍경.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정선 가리왕산·오일장 트레킹···깊은 골마다 아리랑 구슬픈 가락 절절하구나
정선 아리랑 동상.
돌아 나온다. 지상은 여전하다. 가리왕산을 떠나 정선 오일장으로 향한다. 정선에 도착한 우리는 배가 고팠으므로 곤드레 명가 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곤드레밥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있어, 안내를 맡은 서덕웅씨가 가리왕산이 들어가는 아라리 몇 곡을 더 불러 주었다. "…가리왕산 산천이 돈더미만 같다면, 조선팔도 보이는 처녀는 다 내 차지 아닌가. 가리왕산에 실안개 도는 건 눈비나 줄나구 돌지만, 이산 두메 뜬 색시야 누구를 홀릴라구 떴나. 가리왕산 갈까마귀는 까왁까왁 짓는데, 정든 님 병환은 점점 깊어만 가네. 가리왕산 곤드레 딱주기 다 시어 자빠지나마, 요 방중에 계시는 어른들 부디 늙지 마서요.…" 가락과 가사 자체의 서정성과 다양성이 탁월하다. 심금을 울리는 정선 아라리, 들을수록 몰입되는 아라리 가락, 그 깊은 골 노래의 여운이 절절하다. 정선 아라리는 들으면, 또 다른 현실과 만나기도 한다. 나의 꿈과 풍성한 내면에서, 상상할 수 없는 즐거움, 비견할 수 없는 환희가 나를 형해화한다. 바람이 불면 밭에서 술 취한 사람처럼 곤드레만드레 비틀거린다는, 그 곤드레 비빔밥으로 허기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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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오일장은 지척에 있어, 아라리 가락으로 걸어서 시장으로 간다. 정선 장은 우리나라 대표 전통시장이다. 끝자리가 2·7일에 개장하는데 이곳 주민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여행객들로 북적거린다. 오일장 음식으로는 콧등치기국수, 감자옹심이, 곤드레나물밥, 메밀국죽, 올챙이국수, 황기 닭백숙, 메밀전병 등 별식이 있다. 여니 잡화점에서 서덕웅씨의 지인을 만나, 아라리 한 곡조만 불러보라 청했더니 주저 없이 "…영감아 꼭감아 말 잘 들어라, 보리방아 품팔아서 떡해다 줌세. 날마다 부지깽이로 날 때리던 시어머니 공동묘지 오시라고 호출장이 왔어요. 고치밭 한고랭이도 못 매던 저 여자가, 이마 눈썹을 매라고 하니 여덟 팔자로 매네" 하고는 훨훨 웃는다. 그의 웃음은 날개가 되어, 아리랑 고개 고개로, 우리 모두를 넘겨 주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이날은 그렇게 정선 트레킹을 마칠 수 있었다.

글=김찬일<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유판도 여행사진작가


☞문의: 정선 가리왕산 케이블카 (033)560-3467

☞내비 주소: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 산 400

☞트레킹 코스: 가리왕산 하봉 정상 전망대 둘레길, 정선 오일장

☞인근의 볼거리: 하이원 리조트, 화암동굴, 스카이워크, 집와이어, 정선레일바이크, 아우라지, 아라리촌, 정암사, 만항재, 오장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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