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 심장소리] '폴 다이어리'(크리스 크라우스 감독 ·2010·독일 외)…전쟁이 일어나기 전, 한 소녀의 기록

  • 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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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23 08:39  |  수정 2023-06-23 08:41  |  발행일 2023-06-23 제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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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거대한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그와 비슷한 작은 일들이 여러 번 일어난다는 게 '하인리히 법칙'이다. 인류 최대의 비극 중 하나인 1차 세계대전 역시 그런 것 같다. '폴 다이어리'를 통해 본 1914년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주의로 인한 냉혹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마침내 폭발하는 해 같다. 발트해를 배경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어두움과 대비되는 소녀의 순수한 사랑이 인상적인 영화다.

1914년 여름, 14세 소녀 오다는 베를린에서 에스토니아로 간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다. 재혼한 아버지는 시체 해부와 실험에 몰두하는 의사다. 그는 러시아와 독일의 속국인 에스토니아인들의 시신을 사들인다. 외로운 소녀 오다 앞에 죽어가는 에스토니아인 슈납스가 나타난다. 오다는 실험실 2층에 몰래 숨겨주고 돌봐준다. 슈납스와 가까워진 오다는 함께 도망치자고 말하지만, 1차대전이 터지고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

'포 미니츠'(2006)의 크리스 크라우스 감독이 대고모인 여류시인 오다 셰이퍼(1900~1988)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독일영화제 4개 부문(남우조연, 촬영, 의상, 아트 디렉션상)을 수상했으며, 2010년 제작된 유럽 영화 중 최대 규모의 세트와 엑스트라를 동원했다. 당돌하면서도 싱그러운 매력을 보여주는 오다 역, 파울라 베어의 데뷔작이다. 극 중 나이와 비슷한 10대의 그녀는 이후, 독일을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한다.

아름다운 발트해를 배경으로 한 수상가옥의 서정적인 모습과 비교되는 시체 해부, 뇌, 포르말린, 샴쌍둥이 표본 등은 영화의 분위기를 어둡게 한다. 가족이 함께 연주하는 '숭어'를 비롯한 클래식 선율 속에 펼쳐지는 우아함과 불륜, 폭력은 인간의 위선과 기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어둡고 기이한 집안 분위기와 대조되는 소녀의 친절과 사랑은 어둠과 빛의 대비 같다. 냉혹한 흑백논리로 '범죄자 아나키스트'의 뇌를 해부하는 아버지와 죽어가는 아나키스트에게 먹을 것을 내밀고 살리려는 오다의 세상은 다르다. 어쩌면 아버지의 세상에서 도망치려는 오다가 당연해 보인다. 전범국 독일의 후예로서 바치는 감독의 참회록인지도 모른다.

오다가 살려준 아나키스트, 슈납스는 작가였다. 그녀는 슈납스에게 작가가 되는 길을 묻는다. 일기를 쓰며, 글 속에서나마 '비명을 지른다'던 오다는 후에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이 된다. 슈납스는 결국 오다를 구하고 목숨을 잃는다. "네 삶은 충만할 거고, 우린 영원할 거야"라는 글을 남긴 채. 기억에 남는 엔딩이다. 슈납스와의 장면은 상상력을 많이 동원했다는 감독의 인터뷰가 있지만, 영화 자체로 기억하고 싶다.

'폴 다이어리'는 광기의 역사인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한 소녀의 기록이다. 1차대전의 비극이 끝나고 무수한 참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2차대전이 일어나고, 아직 인류는 전쟁의 그늘에서 헤매고 있다. 어느 석학의 말대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답일 텐데 과연 길이 있을까. "기억하라, 탈출구는 없다. 과일 속 씨처럼 네 안에 있을 뿐." 어른이 된 오다가 남긴 마지막 말이 마음에 남는다.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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