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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희 (대구소방안전본부 현장대응과 소방경) |
지난 2월 대구 북구 침산동 한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운전자는 의식이 명료했고 큰 외상이 보이지 않았다. 환자는 두통과 요통, 불안감을 호소했으나 다른 생체 징후는 모두 정상 수치였다. 환자는 평소 진료 이력이 있던 A대학병원으로 이송을 원했지만, 해당 병원은 당시 불가능한 진료과가 있어 구급대원은 환자에게 다른 병원으로 이송을 권유했다. 하지만 환자는 막무가내였다. 급기야 그 병원이 아니면 안 된다고 떼를 쓰기도 했다. 환자는 자신이 가길 원했던 A 병원 앞에서 "진료가 불가하다"는 얘길 직접 듣고 나서야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 달라고 했다. 그제야 구급대원은 또 다른 병원의 진료상황을 확인하고, 이송 가능 여부를 문의한 뒤 다른 응급실로 향했다.
이 같은 일은 응급구조 현장에서 비일비재하다. 의료기관 등 임상경력 2년 이상의 간호사면허 또는 1급 응급구조사 자격을 소지하고 있는 구급대원은 그 누구보다 의료기관의 현황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의 강력한 요구에는 경력도 지식도 뒷전이 된다.
지난 3월19일 추락환자 사망, 5월6일 5세 소아 고열 환자 사망, 5월30일 교통사고 환자 사망 등 전국 각지에서 '응급실 뺑뺑이'로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다. 이 같은 일로 환자의 가족뿐 아니라 당시 이송을 담당한 구급대원도 오랜 기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는다. 구급차 안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으며 긴 시간 환자를 끌어안고 있었던 상황과 심정지가 온 환자의 가슴을 누르며 제발 살아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수포로 돌아갈 때의 충격이 상당한 탓이다. 많은 구급대원이 사건 경위 조사와 정신과 진료를 번갈아 받으며 그 고통을 온전히 버텨내고 있다. 119구급대원뿐 아니라 환자가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응급실의 의료진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환자 수용능력이 안 되는데 긴급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같은 사고를 막기 위해선 경증 환자의 의식변화가 필수적이다. '무조건 큰 병원'을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대구는 1개의 권역응급의료센터와 권역외상센터, 5개의 지역응급의료센터, 12개의 지역응급의료기관을 갖고 있는 도시다. 경증환자가 주말과 야간 종합병원 응급실 치료만 지양한다면 인근 경북이나 경남에서 환자가 밀려든다고 해도 응급실 포화, 의료진 부족 등으로 환자 수용이 안 되는 일은 지금보다 현저히 감소할 것이다.
지난해 대구소방안전본부 119구급대에서 지역응급의료센터 이상의 진료기관으로 이송한 건은 4만7천770건으로 전체 이송 9만2천651건의 52%에 달한다. 하지만 전체 이송 중 응급환자로 분류된 건은 1만7천966건으로 19.4%에 불과하다. 응급환자가 아니더라도 무조건 큰 병원을 가고자 하는 환자의 의중이 반영된 탓이 크다. 물론 환자의 상태는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비응급 환자 중에서도 갑작스레 응급상황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의료기관 간 전원 체계만 잘 구축돼 있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누구나 본인과 가족이 가장 긴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판단이 되지 않을 때에는 출동한 구급대원의 객관적인 정보와 의견에 귀 기울여 주길 간곡히 부탁한다. 의료정책의 개선은 정부와 의료진, 공무원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
주정희 (대구소방안전본부 현장대응과 소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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