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제목을 입력하세요

  • 신민건 대구문화예술진흥원 주임
  • |
  • 입력 2023-08-03  |  수정 2023-08-03 07:56  |  발행일 2023-08-03 제14면

[문화산책] 제목을 입력하세요
신민건 (대구문화예술진흥원 주임)

이 소고(小考)의 시작은 무제(無題)였다.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이었고 작품을 마주한 건 대구미술관 '노중기'展에서였다. 허름한 성조기에 그려진 어떤 시대정신 같은 1988년의 무제, 다채로운 파스텔톤 하트들이 떠다니는 2023년의 무제, 흘러내리는 붉은 심장들이 그려진 무제와 푸른 붓의 흔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엄치는듯한 무제도 있었다. 무제, 흔히 예술작품 따위에서 일정한 제목이 없다는 뜻으로 제목 대신 사용한다. 무제로 지어진 작품을 볼 때면 제목을 짓지 못한 고충을 느끼기보단 창작의 끝에서 창작물을 두고 명명해 가두고 싶지 않은 작가의 열망을 느끼고는 한다.

무제로 시작한 작은 생각이 생에 대한 고찰로 번진 것은 대구미술관의 2023 다티스트 김영진 작가의 개인전에서였다. 설치미술가 김영진이 창조한 공간에는 불완전한 대칭들이 있었고, 갖가지 신체의 흔적들이 가둔 시간이 맴돌고 있었다. 그가 오래도록 창조한 비정형한 시간의 흔적과 비틀어진 대칭은 그가 청년이었던 시대보다 오히려 현재에 어울리는 것들이다. 최근 MZ세대가 그의 작품에 열광하고 찾는 이유이지 않을까. 전시의 표제인 '출구가 어디예요?'는 출구가 어딘지 묻고 있으나 작가가 표현한 설치 작품을 미루어 보면 딱히 출구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확실한 정언명령 같은 인생에서 출구를 찾기보다는 스스로의 불확실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 전시는 모두 지역에서 오랜 기간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친 중견 작가를 조명하고 있다. 노중기展에선 제한된 표제에 갇히지 않은 채 작품을 해체하고 관음하고 해석하며 예술에 대한 작가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김영진 작가의 공간에선 그의 세계에 침잠해 있다 살아온 생을 돌아보게 됨으로써 출구를 찾지 않아도 충분한 출구 없는 매력을 느꼈다.

무제로 시작해 생의 고찰로 닿은 이 소고는 하나의 질문과 하나의 답으로 방점을 찍을 수 있겠다. 인생을 예술작품처럼 두고 누군가 제목을 지어보라 한다면 과연 뭐라 답할 수 있을까. 노중기 작가의 작품처럼 인생을 명명해 가두고 싶진 않으니 정해진 대원칙의 표제는 없다. 그러나 불확실한 생에서도 살아있음을 잊지 않는 김영진 작가의 세계처럼 때때로 지나쳐 갈 표제를 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 생의 표제를 '제목을 입력하세요'라 적어본다. 세태의 몰락, 시대정신, 새로운 패러다임, 선택의 순간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불확실함을 인정하고 언제든 표제를 썼다 지웠다 다시 쓸 수 있도록.

신민건〈대구문화예술진흥원 주임〉

기자 이미지

신민건 대구문화예술진흥원 주임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