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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설치미술작가> |
사람들 사이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인연을 '하늘이 맺어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운명'과 비슷한 의미로도 사용한다. 이런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 사람과 사물에도 있을 수 있으며, 직업에서도 운명 같은 인연이 있을 수 있다. 그 운명 같은 인연을 나는 '천직'이라 부르고 싶다.
영어권에서 '천직'이라는 단어를 신의 부름을 의미하는 'calling'이나 'vocation'이란 단어로 사용한 것은 서양에서도 천직이 하늘이 정해준 운명 같은 인연이라는 의미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라는 직업과 그 삶이 어떠할지도 모를 중학교 3학년 시절 나의 일기장에는 예술가로 살고 싶다고 다짐한 글이 있다. 세상 모를 나이에 나의 결의가 무모하기도 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내가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구심점이 되었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나를 중학생은 받아주지도 않던 입시 미술 전문학원에 어렵게 등록시키셨고 입시생들로 가득 찬 학원 구석에서 거의 한 달 가까이 4B연필로 선 긋기만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는 학원에 재수생은 물론 3수 4수생들도 대학 진학을 위해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던 시기였기에 중학생인 나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몇 달 후 나는 서양화, 산업디자인, 공업디자인, 조소, 입시에 대한 부담 없이 다양한 전공을 조금씩 경험하다가 한국화를 배우는 순간 붓을 놓기 싫고 계속 함께하고 싶은 운명 같은 만남을 느꼈던 거 같다. 그날이 내가 미술(작업)을 평생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하게 느낀 중3 10월8일이다.
하지만 대학 진학 후 작가라는 직업으로 평생을 살 수 있을지 의심됐다. 그래서 내가 더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뭔가가 있지 않은지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확인해 왔었고, 그럴 때마다 '작업'하는 게 점점 더 좋아지며 마치 첫사랑이 이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품을 하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하고, 관심 없던 분야의 책을 보고, 그렇게 30대가 되어서야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을듯한 고집과 확신이 생기며,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나의 삶이 작업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예술가는 타고나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타고난 작가일까? 과거에 스스로 수없이 했던 이 질문의 대답에, 나는 이제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운명이 있는 것처럼, 작업을 하지 않으면 공허하고 죄책감에 괴롭다면 그건 천직이고, 타고난 예술가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직업을 택하면 평생 하루도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는 공자의 말처럼 평생 나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박정현<설치미술작가>

박정현 설치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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