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산책] 귄터 그라스 '양철북'…오스카르의 시각서 20세기 전반 獨역사를 꼬집다

  • 박병덕 교수 전북대 명예교수
  • |
  • 입력 2023-11-03 08:54  |  수정 2023-12-12 10:34  |  발행일 2023-11-03 제25면
나치점령부터 2차대전 종전후까지
'허구적 자서전 형태' 그라스 첫 장편
1959년 출간…1999년 노벨문학상
과거청산이라는 심각한 주제 불구
현실·환상 사이 끊임없는 상호작용
엄청난 탄력성으로 흥미롭게 읽혀



2023101501000386600016801
2002년 5월 당시 서울 남산 독일문화원에서 기자회견하는 귄터 그라스. 연합뉴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광은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라고 격찬한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에게 돌아갔다.

그라스는 1927년 자유시 단치히(현재 폴란드령 그단스크) 변두리 랑푸르의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2015년 독일 북부 뤼베크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가로서 창작활동을 꾸준히 해왔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지식인의 역할도 적극적으로 해왔다.

그가 현실정치와 맺어온 밀접한 관계는 전통적으로 현실 참여를 꺼려온 독일 문단은 물론이고 세계 문단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독특한 것이다. 1961년 사회민주당 연방수상 후보 브란트를 돕는 선거전을 시작으로 현실정치에 뛰어든 그라스는 나치 과거청산 문제를 비롯한 독일 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반전운동, 환경운동, 인권운동 등 평화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끊임없이 싸워온 전투적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반동의 부작용과 유혈사태가 뒤따르는 급진적 혁명에는 반대했으며, 사회적 진보란 달팽이의 속도에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인내를 통해서만 진보가 달성될 수 있다는 점진적 개혁주의자의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해왔다.

1958년 미완성 상태로 47그룹상을 수상함으로써 문단의 지대한 관심을 받다가 1959년에 출간된 '양철북'은 서정시로 데뷔한 그라스의 첫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양철북'은 허구적 자서전 형태를 취하고 있는 소설로서, 총 3부 46장(제1부 16장, 제2부 18장, 제3부 1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이자 일인칭 서술자인 오스카르는 1952년 9월 간호사 도로테아의 살인 사건 용의자로 체포되는데 재판 후 정신 이상을 의심받아 서독 뒤셀도르프의 한 '치료감호소'에 수감 된 채 1952년 10월부터 1954년 7월까지 지내다 진범이 잡히자 석방된다. 오스카르는 치료감호소에서 생활하는 약 2년(서술시간) 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를 가족사와 연관해 회고하는 일종의 허구적 자서전을 집필하게 되는데, 1899년 10월 어느 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만남 때부터 1954년 7월 치료감호소에서 자신이 강제로 퇴소당할 때까지 약 55년 동안의 시간이 피서술시간(=사건시간)을 이룬다.

서술구조는 순환적 액자구조를 취하고 있다. 액자구조란 바깥 틀을 이루는 외화(外話) 속에 안쪽 이야기인 내화(內話)가 있는 구성 형식인데, '양철북'은 하나의 외화 속에 여러 개의 내화가 있는 순환적 액자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고, 내화와 외화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서로 넘나들고 있으며, 소설의 끝부분에 이르러서는 서로 접맥되고 있다.

외화는 픽션과 메타픽션 두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픽션 차원에서는 오스카르가 치료감호소에 수감 된 이래로 치료감호소 감호인, 자신을 면회 오는 변호사와 가족 및 친지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른 한편, 소설이 하나의 인공물임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메타픽션 차원에서는 오스카르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의문시하거나 성찰하는 과정이 이야기된다. 에피소드로 구성된 모든 장에서 오스카르가 자신의 글쓰기 과정에 대해 성찰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수정하는 대목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현재와 과거 사이의 긴장이 끊임없이 조성되고 있다.

내화는 사적 사건에 대한 허구적 서술 차원과 공적 역사에 근거한 사실적 서술 차원, 두 차원으로 구분될 수 있다. 허구적 서술 차원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전쟁 중 단치히와 그 주변 소시민계층에 속하는 허구적 인물들의 일상적인 삶, 전후 서독의 소시민사회에서 살아가는 허구적인 작중인물들과 관련된 온갖 사건 이야기가 서술된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서술 차원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을 중심축으로 그 앞뒤로 일어난 숱한 역사적 사건들 및 그 사건들과 연관된 역사상 실재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제1부는 1899년 10월 어느 날 감자밭에서 일하던 외할머니(안나 브론스키)가 방화범으로 쫓기던 외할아버지(요셉 콜야이체크)를 폭넓은 치마 속에 숨겨주는 기이한 사건을 시작으로 어머니 아그네스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 아그네스와 알프레트 마체라트의 결혼, 오스카르의 탄생과 그가 세 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양철북, 오스카르의 자의적인 성장 정지, 황달과 생선중독으로 인한 아그네스의 죽음 등을 거쳐 1938년 11월9일 나치의 선동으로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건물 파괴와 방화가 자행된 역사적 폭력 사건('수정의 밤')에서 완구점 주인인 유대인 마르쿠스가 사망하는 11월10일까지의 시기(1899~1938)를 서술하고 있다.

제2부는 독일군의 폴란드 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1일 며칠 전인 8월부터 하루 전인 8월31일 밤의 폴란드 우체국 전투, 1943년 나치 선전부대에 들어간 오스카르의 전방 위문 공연 활동, 전쟁 막바지 소련군이 점령한 단치히에서 알프레트 마체라트가 나치당 배지를 목에 삼키다 소련군에 의해 사살된 사건, 오스카르가 첫사랑이자 계모인 마리아와 그녀의 아들 쿠르트를 데리고 1945년 6월12일 화물열차로 단치히에서 탈출할 때까지의 과정(1939~1945)을 서술하고 있다.

제3부는 종전 후 서독 뒤셀도르프로 피란 온 오스카르와 마리아 및 쿠르트, 그리고 주변 인물들을 비롯한 소시민들의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서술된다. 전후 서독인들이 잘못된 과거를 반성을 통해 극복·청산하려는 노력은 내팽개친 채 과거를 망각해버리고 오직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일상생활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타락한 정신적 풍토가 희화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양철북은 사물상징으로서 '군국주의의 상징'으로서 나치 시대의 선동과 파괴를 암시하는 도구, 서술의 매개체 구실을 하는 서술 도구 등 다양하고 모순된 의미를 지니는데, 특히 제3부에서는 과거를 망각해버리고 싶어 하는 전후 서독 사회에 과거를 망각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각성시키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매체의 기능을 하고 있다.

제1부와 제2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및 전쟁 시기 단치히와 그 주변 지역, 제3부에서는 전후 서독 뒤셀도르프의 소시민사회를 무대로 20세기 전반의 독일 역사를 비판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기본적으로 역사·시대소설의 성격을 지니는 '양철북'이 과거청산이라는 주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읽힐 수 있는 이유로, 치밀한 구성능력과 기발한 착상, 특유의 유머 감각에 따른 입담 등 우선 작가 그라스의 탁월한 재능을 들 수 있지만, '양철북'에 엄청난 탄력성과 유연성, 시적인 생명력을 부여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현실과 환상이라는 상호 보완적인 두 차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반어적 상호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병덕 교수 (전북대 명예교수)
공동기획: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2023101501000386600016802
박병덕 교수 (전북대 명예교수)

박병덕(朴秉德)은 전북대 명예교수로, 연구 분야는 현대독일소설이며,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특히 관심이 많다. 서울대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귄터 그라스의 '넙치'에 나타난 서술기법'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북대 교수회장, 전국국공립대학교수회 상임회장, 전북대 발전지원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귄터 그라스의 문학세계' '현실과 환상의 변증법. 귄터 그라스의 삶과 문학' '카프카 문학론'(공저), '독일 현대 작가와 문학 이론'(공저) 등이 있으며, 주요 번역서로는 '싯다르타'(헤세), '카프카 단편집'(카프카), '그리고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보르헤르트), '파우스트 박사'(토마스 만)(공역), '군중과 권력'(카네티)(공역), '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귄터 그라스의 소설에 나타난 환상적 리얼리즘' '그라스의 역사개념과 '넙치'에 나타난 동시성의 기법'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 대한 독서모델' '페터 바이스의 기록극 이론과 '수사'' '카프카의 '변신' 연구' 등이 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