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핑계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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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23 06:55  |  수정 2023-10-23 06:57  |  발행일 2023-10-23 제23면

매일 저녁 식당에서 혼자 소주 2병을 마시는 중년 남성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한 병만 시켰다. 식당 주인이 궁금해져서 그 이유를 물었다. 남자가 답했다. "원래 한 병은 내 것이었고, 다른 한 병은 술 좋아하던 죽은 친구를 위해 대신 마셔준 것이었소. 그런데 나는 술을 끊었소." 물론 유머다. 저승에 있는 친구의 '흑기사'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알코올 중독자의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하지만 마냥 비웃기에는 켕기는 게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신의 잘못이나 은밀한 욕구를 이런저런 핑계로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않는가.

인간은 언제부터 핑계를 대기 시작할까? 심리학계에서 통용되는 연구에 따르면 평균 6세 때부터 자아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고 7세 때부터 남에게 비치는 자기 이미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9세가 되면 자신의 결점이나 실수를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보호 본능이 강해져 온갖 핑계를 댄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형성된 핑계 습관은 어른이 돼서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더욱 심해지면 모든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병적인 상태가 된다. 극악한 범죄자들조차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사회적 차별의 피해자라고 여긴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핑계를 가장 잘 대는 부류를 꼽으라면 단연 정치인이다. 물론 그들의 핑곗거리는 죄다 '국민'이다. 이전투구의 정쟁과 막말의 이유도 "국민이 원해서, 국민을 위해서"라고 한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국민'은 누구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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