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남 함양 용유담, 푸른 물빛, 꿈틀대는 바위…용이 노니는 듯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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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16 08:07  |  수정 2024-02-16 09:04  |  발행일 2024-02-16 제15면
크고 작은 돌개구멍·기묘한 바위 장관
점필재·남명 등 암석 각자 300여개 남아
봄이면 수달래·산벚 뒤덮어 '꽃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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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교에서 본 용유담. 첩첩으로 쌓인 바위를 타고 거세게 흐르던 임천은 어느 순간 호수처럼 넓어지며 잠잠해진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에 습한 초록의 이끼가 소복하다. 주변의 풀숲에는 햇살이 몇 점 뿌려져 있었고 흙빛의 작은 새들이 먹이를 찾듯 빛을 찾아 포르르 날아올랐다 내려앉았다. 모든 수목의 밑동과 눈 맞춤하며 나아가는 골짜기의 사면은 상당한 조심성을 요구했다. 길이라기보다는 앞선 사람들의 흔적이라는 게 옳겠다. 흙과 이끼와 낙엽을 지나 비로소 바위를 디뎠지만 얼음이다. 17℃의 낮 기온에도 음지는 아직 얼음이다. 4월 수달래가 필 즈음에 왔어야 했나,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한발 한발 집중해 전진한다. 그리고 마침내 물을 본다. 깊고 푸른 물, 미동도 없는 고요한 물빛. 뇌에서 깅- 소리가 들린다. 세계가 천천히 회전한다. 정신을 잃은 채 천궁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용이 노는 연못, 용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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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글씨는 '인종이 강현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의미의 각자다. 그 왼편에 점필재 김종직,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남명 조식의 이름이 희미하다.
움찔 고개를 내젓는다. 휘청거리는 몸을 다독인다. 바위들은 대개 희고, 반죽처럼 매끈하고, 조각처럼 다채롭다. 축구공만 한 돌개구멍도 있고 수십 명이 들어가도 너끈한 대형 돌개구멍도 있다. 층층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층리는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는 듯하고 암맥으로 보이는 청색의 암석들은 불끈불끈 꿈틀대는 듯하다. 상류의 소실점을 바라보고서야 물소리가 들린다. 첩첩의 바위들 사이로 물줄기가 소리를 내며 하얗게 떨어지고 있다. 안도감이 든다. 눈앞의 푸른 물빛은 너무 오래 바라보면 안 된다. 정신을 차렸지만 오싹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곡 입구에 수영금지라는 커다란 안내판이 있었는데 참으로 당치않다. 누가 저 물빛으로 뛰어들 수 있겠나.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용이 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유담(龍遊潭)이다. 성종 때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오늘도 어둑한 바위틈에 촛불 하나 밝다. 저절로 비손하게 되는 세계다.

지리산 천왕봉의 정북 아래다. 뱀사골, 칠선골, 한신골 등 지리산 북쪽 계곡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 임천이 된다. 첩첩으로 쌓인 바위를 타고 거세게 흐르던 임천은 어느 순간 넓어지며 큰 소(沼)가 되어 잠잠해지는데 그곳이 용유담이다. 임천은 용유담을 지난 후 엄천(嚴川)이 된다. 그러니까 임천과 엄천은 용유담을 가운데 두고 이름을 달리하지만 같은 강이다. 엄천(嚴川)은 신라 때 엄천사라는 큰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절이지만 낙성식 법회에 헌강왕이 거둥하였고 최치원이 사찰의 발원문을 지었다고 하니 얼마나 중요한 절이었는지 알겠다. 과거 지리산 유람에 나선 선비들은 엄천사에 들러 쉬고 용유담에 멈추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김종직은 '돌의 오목한 곳에 물이 고여 있었는데, 내 발이 미끄러져서 신과 버선이 모두 젖었다. 작은 것은 술동이(窪樽, 와준) 같고 큰 것은 구덩이(空, 감공) 같다'고 하였다. 광해군 시절의 남원부사 유몽인은 '돌이 사나운 물길에 깎여 움푹 파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고 했다. 조선 정조 때 학자 이동항은 '시내에 커다란 바위들이 쌓여있었다. 지붕의 용마루, 평평한 자리, 둥근 북, 큰 항아리, 큰 가마솥, 성난 호랑이, 내달리는 용, 서 있는 것, 기대 있는 것, 웅크리고 있는 것 등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계곡에 가득 차 있어 온갖 기괴한 형태의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전설과 역사로 가득한 용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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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물, 미동도 없는 고요한 물빛이다. 크고 작은 포트홀과 층층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층리, 암맥으로 보이는 청색의 암석층 등이 용유담을 기묘하고 다채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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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굴러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바위는 독조대, 뒤로 보이는 다리는 용유교다. 원래의 출렁다리는 태풍 루사 때 유실되었고 2004년에 용유담을 가로질러 용유교를 놓았다.
용유담 바위에는 300여 개의 각자가 있다고 한다. 독조대, 심진대, 경화대, 용유동천, 세신대, 영귀대, 강선대 등이 있고 누군가의 이름 각자도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그중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仁廟恩思惠平姜公顯之地)'라는 붉은 글씨다. '인종이 전직 형조판서였던 강현(姜顯)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의미다. 당 현종이 벼슬을 마친 당나라의 한 시인에게 '물길의 한 굽이'를 하사했다는 고사를 본 딴 자랑이다. 조금 부럽지만 보다 놀라운 것은 그 옆에 나란히 새겨진 4명의 이름이다. 문충공점필재김선생, 문정공남명조선생, 문민공탁영김선생, 문헌공일두정선생. 조선 성리학의 조종(祖宗)들이 모두 이곳에 왔었다.

더 오래전인 신라시대에는 마적도사가 용유담에 마적사를 짓고 은거했다. 도사에게는 나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식량이 떨어지면 나귀를 장에 보냈고 돌아와 울면 도술을 부려 쇠 지팡이로 임천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어느 날 마적도사는 지리산 천왕할매와 장기를 두느라 정신이 팔려있었고 때마침 용유담의 용들은 서로 승천하려 소란스레 싸우고 있었다. 그 통에 장에서 돌아온 나귀는 울다 지쳐 그만 죽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적도사는 장기판을 던져 버리고 용유담의 아홉 용 가운데 눈먼 용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쫓아버렸단다. 용유담 주변에는 마적도사 전설과 관련된 이름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마적동'이라는 지명, 눈먼 용이 굴 안에 잠들어 있어 늘 거품이 떠오른다는 '거품소', 마적도사가 물을 마신 '도사 우물', 마적도사가 던진 장기판의 깨진 반쪽이라는 '장기판 바위', 도사의 이름을 딴 소나무인 '마적송'도 있다. 이렇게나 생생한 전설이 또 있나.

가사어(袈裟魚)란 말이 있다. 못 위로 드리워진 소나무 그림자를 보다가 제 몸의 무늬마저 그 그림자와 같게 된 물고기, 그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의 가사(袈裟)와 같다 하여 '가사어'라고 한다. 가사어는 지리산 서북쪽에 있던 달공사(達空寺)의 저연(猪淵)에서 태어나 가을이면 물 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다시 올라갔다고 한다. 물빛처럼 투명하고 물살보다 빨라 눈에 띄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한다. 조선의 국가공식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가사어의 서식환경과 관측기록, 심지어 포획방법까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김종직은 '달공사 아래에 있는 물고기는/ 붉은 갈기 얼룩 비늘에 맛이 더욱 좋구나'라 했으니 필시 잡아먹은 것이다. 유몽인은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게 하였으나 수심이 깊어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고 했다.

지리산의 기반암이 조성된 것은 18억 년 전이다. 까마득한 지질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는 역사시대까지 용유담에는 무수히 많은 시간과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고여 있다. 가장 근래의 것은 1984년부터 거의 30여 년 동안 수많은 갈등과 논란을 빚었던 '지리산 댐' 건설을 무산시킨 일이다. 댐 건설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용유담이 물에 잠긴다'는 것이었다. 괴테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했는데 나는 인간의 낭만이 세계를 구한다고 화답하고 싶다. 물론 작은 소리로. 지리산이 연두가 되는 봄이면, 용유담 골짜기에 수달래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주변 마을은 산벚과 홍매화, 복사꽃으로 뒤덮인다. 꽃 그림자 아롱대는 용유담에서 누군가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가사어를 볼지도 모른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함양IC에서 내린다. 톨게이트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해 함양 방향으로 간다. 주차장사거리에서 24번국도 남원 방향, 난평삼거리에서 지리산, 남원, 마천 방향으로 가다 '지리산 가는 길' 이정표 따라 좌회전해 1023번 지방도를 타고 간다. 지안재, 오도재를 넘어 금계리에서 '지리산 가는 길'이 끝나고 60번국도 '천왕봉로'가 임천 따라 이어지는데 좌회전해 3㎞ 정도 가다 고양터, 송대, 모전마을 이정표 따라 오른쪽 골짜기로 내려가면 바로 용유교다. 다리를 건너면 공중화장실이 있고 곁에 반야정사가 위치한다. 반야정사 마당을 가로질러 계곡 쪽으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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