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코티분의 향기

  • 이향숙 (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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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4-24 07:49  |  수정 2024-04-24 07:51  |  발행일 2024-04-24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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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숙 <(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화장대 위의 뽀얀 먼지를 딸이 보는 앞에서 휙 날려 보냈다. 양 갈래 머리를 한 액자 속 소녀는 사라졌으나, 거울 속 엄마는 여전히 여자로서 삶을 살고 있다. 얼마 전 사 드린 선크림은 보이지 않고, 유통기한이 몇 달이나 지난 화장품을 바르고 있다. 나는 엄마를 타박하며, 새로 산 선크림의 행방에 대해 여쭈었다.

머뭇거리던 엄마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아랫마을 새댁이 생일이라 줬다."

그 말에 화가 난 나는 뚜껑이 열려 있던 '코티분'을 닫아 선크림과 함께 쓰레기통으로 넣었다. 얼굴에 발라도 효과 없을 화장품이다. 기한이 지난 화장품을 쓰는 엄마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나는 가라앉지 않는 화를 누르며 대문 밖으로 걸었다.

동네 어귀, 논두렁에 줄지어 선 민들레가 어느새 하얗게 부풀어 날아갈 태세였다. 엄마의 머리카락도 민들레처럼 새어 있었다. 저만치서 베트남 새댁이 갓 돌 지난 아기를 안고 마을을 돌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자천댁 할머니는 아이의 양말 없는 발을 보며 새댁을 타박했지만, 그 시선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는 딸의 시선을 의식하며 다가와, 베트남 새댁과 아기를 반겼다. 엄마의 얼굴이 익숙한 아기는 엄마의 '까꿍' 소리에 방긋 웃으며, 포대기를 푸는 엄마의 품으로 안겼다.

사람은 특정 향기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코티분의 향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코티분 사용자가 우월감을 느꼈다고 하지만, 엄마는 우월감이 아닌 외할머니를 그리워해서 아직도 바른다. 엄마의 코티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의 욕구 충족용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향기를 환기하는 매개였다.

당신은 유통기한이 지난 화장품을 쓰면서도 새 화장품을 이웃 새댁한테 기꺼이 선물하는 엄마를 보며 엄마의 봄날이 하얀 민들레처럼 저멀리 사라지기 전에 조금 더 챙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얀 머리 염색도 하면서 그 따스한 봄날의 모습을 간직했으면 좋겠다.

그날 오후. 결혼식장 하객으로 출발하려는 엄마를 향해 "분 좀 바르세요, 김 여사님" 하며 넉살 좋게 엄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엄마의 품과 코티분의 향기는 지친 나를 위로했다.

이향숙 <(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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