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여백이 있는 일상

  • 서정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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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23  |  수정 2024-05-23 07:43  |  발행일 2024-05-23 제16면

[문화산책] 여백이 있는 일상
서정길<수필가>

직장에서 벗어나면 마냥 여유로울 것 같았는데 그렇지만 않다. 일정이 빼곡하다. 선약조차 또 다른 일로 발목이 잡힌다. 가슴이 답답하고 맥이 풀린다. 이럴 때면 내면 깊이 내재한 일탈의 욕구가 발동한다. 모든 걸 접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마침, 답답함을 비워낼 좋은 기회가 왔다. 글 벗들의 '번팅'은 '달성습지'에서 가까운 사문진 나루터다.

낙동강은 보 설치로 원형이 훼손되긴 했지만, 다행히 달성습지만은 중장비의 삽날을 면한 곳이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은 마치 여백을 남겨 둔 거대한 수채화다. 호수 같은 강을 바라보며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이곳은 선대 할아버지가 삶의 터전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달성(達城)을 관향(貫鄕)으로 쓰고 있어 더욱 애착이 간다. 강을 사랑한 낙재(樂齋) 할아버지는 부강정(浮江亭)에서 시문을 읊었다. 가볍게 둑길을 걷는다. 발바닥에 전해 오는 촉감이 전신을 가볍게 한다. 새들이 내려앉는 백사장은 채색하지 않아도 비단처럼 곱다. 텅 빈 가슴은 강변 풍광에 녹아들수록 다양한 빛깔로 채워진다.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수하는 도류제다. 갈대와 버들의 요람이었던 이곳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태동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 풍경이 사라져 아쉽지만, 그나마 디아크가 문화의 산실로 우뚝 서 있는 게 다행스럽다. 해가 기울자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듬성듬성 걸린다. 날씨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거센 비바람이 발걸음을 막아선다. 목적지까지 한참을 가야 하는데 난감하다. 조급하지만 더는 갈 수 없어 비바람의 횡포가 잦아지기를 기다렸다. 저녁 무렵이 되자 악천후는 거짓말처럼 휭하니 떠나갔다.

황홀한 석양마저 바람이 몰고 간 후라 다시 느긋한 걸음으로 걷는다. 강은 밀려오는 주변 그림자를 반쯤 안고 흐른다. 땅거미가 밀려들자 허전함이 전신을 휘감는다. 혼자가 아님에도 혼자인 듯 어둠에 자신을 가둔다. 까닭이 있어서도 아니다. 괜히 외톨이가 된 듯하다. 답답함을 털어내고자 나온 것인데 까닭 없이 마음에 무게만 더해진다. 아직도 비워내지 못한 게 남아있는 모양이다. 심호흡을 반복하면서 습지를 품은 강의 평온함을 담노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습지는 숲으로 다 채우지 않고 군데군데 넉넉한 여백을 두었다. 오늘, 잔잔한 강물과 드넓은 하늘과 초록 숲과 새들과 하나 될 수 있었던 것도 여백이 주는 안온함 때문이리라. 이제라도 빼곡하게 채워진 일상을 여백으로 남겨 습지의 풍광처럼 여유로워지고 싶다.서정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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