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퐝여행 레시피-포항을 즐기는 10가지 방법] (5)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는 코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구룡포읍 광남서원-장기읍성·장기향교-장기유배문화체험촌>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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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6-13  |  수정 2024-06-13 08:04  |  발행일 2024-06-13 제14면
바다 품은 적산가옥~조선 유배지…역사 속 그날로 타임슬립
100년, 500년, 천 년,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역사는 삶의 터전 위에 쌓여왔다. 도시 곳곳에서 마주치는 역사는 공간 속을 부유하는 듯해, 우리의 숨과 장소의 숨결이 뒤섞이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때로는 경탄을, 때로는 숙연함을 자아내는 숱한 역사는 오늘을 견인하는 잊히지 않는 장소들로 기억된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카페·음식점 조성…영화·드라마 배경 핫스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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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 집성촌, 포항시 구룡포읍 성동면에 있는 광남서원(廣南書院).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 살해된 충정공(忠定公)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과 그의 두 아들 참판공(參判公) 석(錫)과 직장공(直長公) 흠(欽)을 제향한다.

신라 시대 아홉 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구룡포, 이후 조선 시대까지 구룡포는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다. 1883년 조일 통상장정이 체결되고 일본인의 조선 출어가 본격화되면서 조용한 어촌마을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1906년에는 가가와현의 어업단 80여 척이 고등어 떼를 따라와 구룡포에 눌러앉았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구룡포는 최적의 어업기지로 떠올랐다. 일본인 수산업자인 도가와 야사브로는 조선총독부를 설득해 구룡포에 축항을 추진했다.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든 것이 1923년. 이후 일본인이 대거 몰려왔고 일식 가옥이 빼곡히 들어섰다. 그들은 해방과 함께 도망치듯 떠났고 그들이 살던 집들은 오래 방치되었다.

시간이 흘러 근대건축물에 대한 보존과 복원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2001년 등록문화제 제도가 만들어졌다. 당시 구룡포에는 50여 호의 일본풍 가옥이 남아 있었는데, 그중 47채의 적산가옥이 밀집해 있는 거리를 중심으로 2010년 '일본인 가옥 거리'가 조성되었다. 원형이 남아있던 하시모토 젠기치의 집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이 되었고, 옛 적산가옥들은 정비되어 카페와 식당, 소품 가게 등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거리는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으로 각광받고 있다. 2019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의 가게였던 '까멜리아'는 80여 년 전, 누구나 묵고 싶어 했던 여관이었다고 한다.

거리 가운데 언덕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있다. 백여 년 전 언덕 위에는 신사와 도가와 야사브로의 송덕비가 있었고 계단 양편의 돌기둥에는 신사를 세우는 데 공헌한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해방 후 돌기둥의 이름들은 시멘트로 덮였고 구룡포 유공자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언덕 위는 지금 구룡포 공원이다.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전설의 용 조형물과 야스브로의 비(碑)가 시멘트를 뒤집어쓴 채 서 있다. 신사가 있던 자리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돌아가신 분들과 6·25전쟁 때 산화한 호국 영령을 기리는 충혼탑과 충혼각이 자리한다. 그리고 용왕당이 바다를 감싼 융성한 항구를 내다보며 구룡포 어민의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고 있다.

황보인과 두 아들 기리는 광남서원
멸문 위기속 가문 구한 노비 단량의 비석 세워

구룡포읍의 남쪽에 포항의 친환경 마을 1호이자 메뚜기 쌀로 유명한 성동리가 있다. 장기면과 경계를 이루는 뇌성산 아래, 상정천 변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은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 집성촌으로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 살해된 충정공(忠定公)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의 후손들이 모여 산다. 고요하여 고독감마저 감도는 마을 초입에 황보인과 그의 두 아들 참판공(參判公) 석(錫)과 직장공(直長公) 흠(欽)을 제향하는 광남서원(廣南書院)이 자리한다. 광남서원은 정조 15년인 1791년에 지방 유림들과 후손들이 세덕사(世德祠)로 창건했고 순조 31년인 1831년에 사액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가 1900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경내에는 사당인 충정묘와 강당인 숭의당, 동재와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으며 서원 뒤쪽에 유허비가 있다. 황보인의 책판과 문집 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낸다.

광남서원에는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라 새겨진 비석이 비각에 모셔져 있다. 충성스러운 노비 단량을 기리는 비석이다. 황보인이 단종을 보좌하다 살해되고 가문이 멸문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여종 단량은 가문의 대를 이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황보인의 손자 황보단(皇甫端)을 물동이에 넣고는 뒷문으로 도망쳤다. 단량은 먼저 황보인의 딸이 시집가 있던 봉화의 닥실마을로 갔다. 황보인의 딸과 사위는 노잣돈을 주며 땅끝까지 도망가 숨으라고 했다. 이후 단량은 지금의 호미곶면 구만리 짚신골에 살다 구룡포읍 성동리로 옮겨 평생을 숨어 살면서 황보인의 손자 단을 키웠다. 충성스러운 여종 단량의 충절과 희생으로 대가 끊기는 화를 피한 황보 가문은 4대째 숨죽여 살았고 숙종 때에 이르러 단종 복위와 함께 신원이 회복되었다.

장기읍성과 장기향교
고을 지키는 거산…바다 향하는 장기천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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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장기읍성은 동악산(東岳山)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등성이 해발 100m 높이의 평탄한 곳에 축조되어 있다. 동악산은 해발 252m에 불과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거산(巨山)이 고을을 지켜준다는 뜻의 진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기면은 포항의 남쪽 끝이다. '긴 갈기'라는 뜻으로 장기해안의 모습이 말갈기처럼 길다고 하여 생긴 이름으로 여겨진다. 경주의 동쪽 외곽지대인 장기는 신라 때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져 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고려 현종 2년인 1011년에 동쪽으로는 왜적을 막고 북쪽으로는 여진족의 해안 침입에 대비해 옛 읍성의 북쪽에 성을 쌓았다. 지금의 장기읍성 자리다. 처음에는 토성이었다. 조선 세종 때인 1439년에 석성으로 더욱 굳건히 쌓고 동해안의 군사기지 및 치소(治所)로 이용했다. 장기읍성은 동악산(東岳山)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등성이 해발 100m 높이의 평탄한 곳에 축조되어 있다. 동악산은 해발 252m에 불과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거산(巨山)이 고을을 지켜준다는 뜻의 진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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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가옥 거리'는 47채의 적산가옥이 밀집해 있는 포항 구룡포 거리를 중심으로 2010년 조성되었다. 언덕 위는 구룡포 공원이다.
성의 입구는 동문이다. 문은 사라졌고 그곳엔 회화나무 한 그루와 '배일대(拜日臺)'라 새겨진 바위가 동그마니 자리한다. 저 아래 장기초등학교에서 멀리 신창리 바다까지, 그사이 넓은 현내들과 바다로 향하는 장기천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다. 동문에는 '조해루(朝海樓)'라는 문루가 있었고 정월 초마다 장기 현감이 태양을 맞이하며 제를 올렸다 한다. 서문은 옹성으로 남아 있다. 북문은 최근 복원되어 문루가 올라 있다. 현재 성벽의 전체 둘레는 약 1.4㎞이며 12개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도 성안 마을에 사람들이 살고 마을 한가운데에는 장기향교와 동헌 터가 남아 있다. 동헌 건물인 '근민당'은 1986년 장기면사무소 안에 복원해 두었고 장기향교는 장기초등학교 동쪽에 있던 것을 1931년 성안으로 옮겨 세웠다. 장기향교가 처음 세워진 때가 조선 태조 때인 1398년이라 하니 역사가 깊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교육 공간인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여러 성현을 모시고 있으며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장기유배문화체험촌
다산·우암이 벽지에서 꽃피운 유배문화 엿보기


장기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나 한편으로는 산해(山海)의 벽으로 막힌 오지였다. 한양에서 십여 일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던 섬과 같은 땅, 그래서 옛날 장기는 유배지였다. 조선 태조 1년 설장수를 시작으로 홍여방, 양희지. 김수흥 등 수많은 사대부가 장기를 거쳐 갔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다. 우암은 숙종 때 복상문제로 이곳으로 유배되어 약 5년간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주자대전차의'와 '이정서분류' 등의 책을 썼고 많은 시문을 남겼다. 마을 사람들은 우암을 통해 유학의 진수와 중앙정계의 동향을 접할 기회를 얻었고, 그로 인해 예절을 숭상하는 마을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다산은 1801년 신유년의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이곳에 유배되어 7개월 정도를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마을 사람의 삶과 고을 관리의 목민 형태를 부옹정가,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오적어행 등 130여 수의 글로 남겼다. 읍성 아래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고목과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가 자리한다. 다산과 우암은 읍성의 배일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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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장기의 유배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장기유배문화체험촌'. 조선왕조 500년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이곳에 유배된 이들은 100명이 넘는다.

조선왕조 500년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이곳에 유배된 이들은 100명이 넘는다. 그들은 우암과 다산과 같은 석학들이거나 지식인 또는 중앙의 고위 관료들이었다. 장기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글 읽고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지역민과 교류하면서 지역의 선비들을 가르쳤다. 조선 시대 장기에 세워졌던 서원은 무려 12개, 장기는 인근 동해안 마을 중에서 서원이 가장 많은 고을이었다. 수많은 석학이 장기에서 보낸 유배의 시간은 이 고장을 학문과 예절을 중요시하는 유교의 마을로 변화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그것은 벽지에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 특별한 유배문화였다. 이러한 장기의 유배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이다. 장기읍성 북문에서 '다산과 우암의 사색의 길'을 따라가면 약 15분 거리에 체험촌이 자리한다.

◆여행 정보

구룡포에서 장기면으로 이어지는 긴 해안선을 따라 다양한 숙소들이 자리한다. 구룡포항 남쪽에 위치한 포인트오션풀빌라는 전 객실이 오션뷰이며 애견 동반이 가능한 숙소다. 하정리의 카이로스풀빌라, 이스케이프풀빌라, 메르송풀앤스파, 엠스테이풀빌라, 구말피하우스, 르브아펜션, 파인웨이브펜션, 알록달록 비치펜션 등은 모두 환상적인 바다 뷰를 자랑하는 숙소들이다. 장길리의 포레메르, 온, 글로리아, 바하리, 원모어데이는 모두 이름난 풀빌라들이며 구평리에는 고향의집민박, 어린이 맞춤 숙소인 엘리트독채키즈풀빌라, 대형 인피니티 풀이 있는 포에스카라반파크와 포유카라반파크, 비발디나인풀빌라, 아테나펜션 등이 있다. 장기면 모포리에 있는 어촌일기는 예능 방송 촬영지로 알려져 있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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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박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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