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은경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
선배. 많이 걱정하셨죠. 선배 말고도 외국에 나가 있는 지인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습니다. 외신으로 접한 고국의 소식에 다들 많이 놀랐나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세대는 계엄령을 교과서로 배운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엄마 계엄령이 뭐야,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다는데. 휴대폰에 코를 처박고 릴스나 보는 줄 알았던 딸아이가 물었을 때만 해도 저는 가짜뉴스인 줄 알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휴대폰 좀 그만 봐. 가짜 뉴스야. 실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뉴스도 저는 가짜 뉴스인 줄 알았더랍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대통령이 나오더군요. 종북세력, 국가기관 교란, 내란획책, 반국가 행위,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 저는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라는 요건도, 국무회의 심의라는 과정도, 국회 통고(通告) 절차도, 어느 것 하나 지켜지지 않은 엉성한 계엄 선포에 어리둥절했습니다.
헌법에도 없는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한다는 계엄사령부 포고령은 어디서 나왔고 표결을 위해 국회에 들어가려는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는 근거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국회의원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것을 막거나 계엄 해제 표결을 방해하는 자체가 헌법 위반일 테니까요. 전공의들의 복귀가 포고령에 포함된 것은 또 무슨 뜬금없는 맥락인지요.
단톡방은 곧 난리가 났습니다. 도로를 메운 탱크와 국회 상공을 날고 있는 헬기, 유리창을 깨고 국회로 진입하는 무장 계엄군, 몸으로 막아선 시민들.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황당함과 놀라움이 공포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습니다. 기사를 써야 하나, 거리로 나가야 하나. 단톡방 글부터 지워야 하나.
190명의 국회의원이 일제히 계엄 해제를 의결하기까지 2시간 30분. 평안해야 할 일상은 깨졌고 공포는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지지율 20%대의 대통령 윤석열은 왜 계엄을 선포했는지, 왜 참모들은 말리지 않았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와우(Wow). X에 올린 머스크의 감탄사처럼, 밤사이 이 나라는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야당을 많이 뽑아놓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아침이면 다 끝난다며 천하태평이던 친구가 그제야 단톡방에 한마디 올렸습니다. 표결에도 참석하지 않고 정치적 계산이나 하던 국회의원들을 보니 맞는 말이다 싶더군요. 이들이 앞으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에는 또 어떤 표결을 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선배, 난장 같던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이곳도 다시 아침을 맞았습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사람들은 해맑은 얼굴로 새날을 시작합니다. 추위에 빨개진 얼굴로 종종걸음치며 학교로 직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니 갑자기 울컥합니다. 저 선한 시민들은 저렇게 열심히 하루를 살고 있구나.
역사는 두 번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요.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우리는 지난밤 한 편의 희극을 보았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외부의 침입이나 내부의 대규모 폭력 사태가 없는 가운데 '불쑥' 이뤄진 계엄령은 국격을 무너뜨리고, 혼란을 불러왔으며, 영원히 역사책에 남을 사건이 됐습니다. 안타깝고 부끄럽습니다. 그곳도 트럼프 때문에 시끄럽던데 선배도 고국 걱정은 그만하고 연말 잘 마무리하십시오.
이은경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이은경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