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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
'조각'(이혜영)은 냉장고 한쪽에서 쓰레기통으로 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쉰 복숭아 같은 존재다. 한때는 그녀도 업계 사람들이 모두 군침을 흘렸을 만큼 탐스러운 존재였다. 40여 년간 청부살인을 업으로 해왔던 그녀는 날카롭고 빈틈 없는 마무리 때문에 '손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을 정도다. 그러나 요새는 몸이 예전 같지 않고 눈에 띄게 노쇠해진 것을 자신은 물론 주변인들도 느끼고 있다. 정말 죽을 때가 되었는지, 조각은 과거를 자주 회상한다. 오래 전 어느 겨울, 그녀는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만신창이가 된 채 도로 위에 쓰러진다. 오갈 곳 없던 그녀를 거둔 것은 한 젊은 부부였다. 표정이 별로 없던 남편 '류'(김무열)는 얼마 되지 않아 조각에게 킬러의 자질이 있음을 눈치채고 그녀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조각은 그렇게 '신성방역'의 대모로 성장해 간다.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흠모했던 스승을 잃은 후 트라우마와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조각이 삶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방역의 대상이 선량한 시민들이 아니라 사회를 좀먹는 벌레 같은 존재들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신성방역의 새로운 대표는 방역의 의미는 고려하지 않은 채 비용만 보고 일을 받아온다. 육체적 한계와 정신적 한계를 동시에 느끼면서 조각은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 그런데, 회사에 새로 들어온 '투우'(김성철)가 이상하게 조각의 주변을 얼쩡대며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투우와 얽혀 있는 모진 과거를 기억해낸 조각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을 도와준 수의사 '강선생'(연우진) 가족을 위해 전쟁을 벌인다.
올해 베를린영화제 초청작인 만큼 전체적으로 프로덕션의 완성도가 높고, 배우들의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각의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편집 방식은 비록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닐지라도 독특한 리듬을 부여하면서 개성 있는 장면들을 완성시켰다. 주로 조각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친절할 때가 많고, 그래서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점은 아쉽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가진 근본적인 질문, 즉 인간도 늙으면 파과처럼 버려져야만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만큼은 초고령화 사회로 막 진입한 우리로서 주목해볼 필요가 충분하다. 조각은 한 인간으로서나 사회인으로서나 위기에 봉착해 있지만, 정작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것은 그녀의 과거로 인해 상처 받은 젊은 영혼이자 킬러이기 때문이다. 조각은 투우와의 기억이 또렷해지는 만큼 그의 복수심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파과'는 지금껏 비슷한 갈등을 앞세운 많은 콘텐츠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화해나 타협의 여지를 두는 대신 감독의 결론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그 기준은 아마도 늙음과 젊음에 관계 없이 납득할 만한 정의와 삶의 명분이었을 것이다. 노인도 살만한 나라를 위하여, 살펴볼 만한 작품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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