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개국(BC 57년)하기 이전에 영남 지역에는 신석기인들이 살고 있
었다.
신석기인들의 자취는 문헌자료가 없으므로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만 짐작
할 수 있는데 1980년대 전까지만 해도 낙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부산, 김해
등지의 해안지역에서만 발굴되어 영남 내륙에는 신석기인들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후 경남 합천군 봉산면 봉계리와 김천시 구성
면, 울진군 후포면 등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어 이런 사실을 뒤엎었는
데, 이중 울진군 후포면에서는 석기, 관옥(冠玉) 등과 함께 40명 이상의
매장 인골이 발굴되어 관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들 신석기인들도 현재인들의 선조일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현재인들과 직접 연결되는 선조는 청동기인들이다. 청동기시대에 만
들어진 지석묘(고인돌)는 대구는 물론 포항시, 경주시, 김천시, 안동시,
상주시, 경산시를 비롯해 영남의 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는데 이는
청동기인들이 영남 전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살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 그런데 지석묘는 청동검과 함께 고조선의 표지유물이기 때문에 주목된다
. 실제로 지석묘군이 있는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유적에서는 고조선의 표
지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어 이 지역이 고조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
을 보여주었다.
이 지역이 고조선과 직접적 관계가 있음은 문헌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
다. 다름 아닌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조'이다.
'시조의 성은 박씨요,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前漢)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BC 57년) 4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거서간이요, 그때 나이는
열 세 살인데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先是〕
조선유민(朝鮮遺民)들이 산곡(山谷) 사이에 나뉘어 살면서 육촌(六村)을
이루었다.'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았다는 '조선유민들'이 바로 고조선 유
민들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박혁거세가 육촌을 통합해 신라를 개국하기
이전 경주 부근에 고조선의 후예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김부식(金富
軾)의 위작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위 문헌사료는 이 지역에서 고조선의 표
지유물인 지석묘와 비파형 동검이 출토됨으로써 사실로 입증되었다. 즉 신
라의 선주민들은 고조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저 머나먼 요동벌판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어떻
게 이 영남 지역까지 내려와서 살게 되었는지는 역사적 상상력과 흥미를
자아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조선 사람들이 이 지역까지 남하하게 된
까닭을 추적하다보면 중국 사료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기록들을 접하게 된
다.
먼저 중국 고대 진(晋)나라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동이전
(魏志東夷傳)- 한조(韓條)'에 '위략(魏略)'이라고 인용해 놓은 부분이 있
다. '연(燕)나라는 장군 진개*秦開:연나라 소왕(昭王:BC 311-BC 279년) 때
장수〕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역을 침공해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
한(滿番汗:요동 지역의 군현)을 경계로 삼았다'는 구절이다. 기원전 4-3세
기의 상황을 보여주는 이 기록은 중국 전국(戰國)시대의 강국 연나라의 공
격에 쫓긴 고조선 사람들 중 일부가 영남 지역까지 피난 왔을 가능성을 보
여주는 사료이다.
또 한 기록은 후한서 '동이열전- 한(韓)조'인데, '과거에 조선왕 준(準
)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경유해
*走入海〕 마한을 공격해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는 기록이
다. 이는 기원전 190년경의 상황인데, 위만에게 요동을 빼앗기고 한반도로
이주하는 준왕을 따라왔던 고조선 유민 들 중 일부가 영남지역에 정착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에 영남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비단 고조선 사람만은 아니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는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진한이 오늘날 영
남지역이라는 점에서, 이 지역에는 중국 진나라 2대 황제 호해(胡亥) 때
발생한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BC 209년) 등을 피해 이주한 진나라
사람들도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남하한 고조선이나 진나라 사람들은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여
러 영남지역에 촌(村)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중 경주 부근에는 고조선
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6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지배자들은 지석묘를
만들어 권력을 과시하는 한편 고조선과 문화적 동질성을 표시했던 것이다
. 그 육촌의 촌장들에 대해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李)씨, 정(鄭)씨,
손(孫)씨, 최(崔)씨, 배(裵)씨, 설(薛)씨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현재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삼고 있는 이들 성씨들의 실제 유래는 고조선인 셈
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들 6부의 촌장들은, '백성들이 모두 방종해 제멋
대로 놀고 있으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모셔야겠다'고 의논하
는데, 때마침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우물 곁에 번개 같은 기운이 땅에
드리우더니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어서 가 보
았더니 보랏빛 알 한 개가 있었다. 그 알에서 나온 아이가 신라의 시조 박
혁거세이다. '삼국사기' 기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 수풀 사이에
서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으므로 가서 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어 이를 가르니 그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으므로 데려다 길렀
다. 그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뛰어나게 숙성하여 육부(六部)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이했으므로 떠받들어 높이더니 이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삼국사기 '시조 혁거세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박혁거세가 토착 육촌세력과는 다른 세력임을 설
명해주고 있는데, 이는 결국 박혁거세가 이주세력이라는 뜻이다. 혁거세는
부여 시조 동명이나 고구려 시조 주몽처럼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卵生
)설화'의 주인공인데, 다른 점은 혁거세의 난생설화에는 유일한 동물로 말
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박혁거세 집단이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치세
력임을 뜻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박혁거세가 북방 유목민족 출신이 아니
냐는 견해가 예전부터 있어왔다.
이는 박혁거세가 몽골에서 왔다는 견해와 흉노(匈奴)에서 왔다는 견해로
크게 나뉘는데, 몽골과 연결시키는 견해는 언어학적 방법이 주로 이용되었
다. 몽골의 영웅 게세르(Keser) 서사시에 등장하는 '게세르 칸(Keser qan
)'과 혁거세를 연결시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삼국사기'는 박혁거세의 왕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 왕호가 게세르와 음성적으로
같은 음독(音讀)이라는 것이다. 또한 '붉다.밝다'는 뜻의 '혁(赫)'자는 '
붉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게세르의 훈독(訓讀)이라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혁거세를 '불구내(弗矩內)왕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데, '불구내'는 몽골어에서 '전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불구내왕
은 '전체의 왕', 또는 '왕 중의 왕'의 뜻이 된다. 6부의 촌장들도 지석묘
를 세울 정도의 지배력을 갖고 있는 소왕(小王)들이었으므로 이들에 의해
군주로 추대받은 박혁거세는 '전체의 왕'이나 '왕 중의 왕'이 되는 것이다
.
박혁거세를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족과 연결시키는 견해는 동흉노(東匈
奴)의 고석(姑夕:Kuseki)이 반란을 일으킨 해가 기원전 58년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반란 후 그는 중앙아시아에서 종적이 묘연해져 주목을 끌
었는데 1년 후인 기원전 57년 경주 부근에 나타나 신라를 건국했다는 것이
다.
박혁거세의 정확한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그
가 최소한 경주 부근의 6촌장들보다는 군사력이나 농경기술에 있어서 더
나은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삼국사기 '시조 혁거세' 17년조
는 그가 육부를 순행하면서 농사와 양잠을 장려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혁거세는 재위 21년(BC 37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고 이
름지었다. 왕성을 갖춘 천년왕국 신라의 탄생인 것이다.흉노족과 적석목곽
분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은 몽골국립역사박물관 및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
연구소와 몽골의 아르항가이 지역과 홋드긴 통고이(우물언덕) 지역을 공동
발굴했는데, 1세기 무렵 흉노족의 장군 무덤 4기를 발굴한 아르항가이 지
역은 몽골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서 가까운 흉노족의 본거지이다. 이 지역
의 발굴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덤 양식이 적석목곽분이기 때문이다. 직
사각형 구덩이에 시신을 안치하고 나무 덧널을 넣은 다음 돌을 쌓아올리는
적석목곽분은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대거 분포되어 있는 무덤 양식이라는
점에서 두 지역의 상관관계는 고대 신라사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이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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