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 독립유공자 그 후손들의 삶 .9] 정재호 선생 아들 훈식씨

  • 입력 2004-09-11   |  발행일 2004-09-11 제1면   |  수정 2004-09-11
무장항일·獄死한 志士의 아들, 한평생 머슴·미화원 '고된 삶'
가난 찌든 지난날 생각하면 한숨 나오지만
'파리 장서 서명 137人' 아버지 자랑스러워
가난 대물림…자식 교육 제대로 못시켜 恨
[향토 독립유공자 그 후손들의 삶 .9] 정재호 선생 아들 훈식씨
독립운동가 정재호 선생의 아들 훈식씨가 임고면 양항리 도로변에 세워진 선천의 비석 주변을 청소한 뒤,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천] "선친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독립 유공자 후손으로 자부심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항일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돼 옥사한 정재호(鄭在鎬) 선생의 후손인 훈식씨(66·영천시 문외동)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자랑스럽지만 찌들게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온 지난날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선친이 독립 유공자로 선정되면서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고있다는 정씨는 어릴 적부터 짚신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다 고경면 도암리, 하양 등 남의 집을 전전하며 노동 일을 해주는 대가로 쌀을 받는 머슴살이 생활로 청년기를 보냈다.

머슴살이로 겨우 끼니를 해결할 뿐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온 그는 독립운동으로 일찍 여읜 선친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 유공자라는 사실을 위안 삼고 살아왔다며 지난 날을 회상했다.

그는 한글을 전혀 깨치지 못한 까막 눈이었지만, 군에 입대해 동료들의 도움으로 글자를 깨칠 수 있었다고 했다.

16년간 영천시청 환경 미화원으로 근무하다 5년전에 퇴직한 그는, 10년전 근무 도중 쓰레기 차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쳤으나, 치료를 제대로 하지못해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게다가 부인과 일찍 사별해 생활고로 가정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하나있는 아들마저 사회생활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것이 늘 가슴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늦게나마 선친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고, 고향에 선친의 독립유공을 기리는 비석까지 세워진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선친은 체격이 우람하고 27세때 부터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선친에 대해 알고있는 전부라는 그는, 가난때문에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것이 늘 한스럽다.

1919년 3·1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지 못한 유림 인사들은 김창숙·곽종석 등을 중심으로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한 파리장서를 제출했는데 임고면 우항리 출신인 정재호 선생은 이때 서명한 137인중 한사람이다. 이후 본격적인 운동을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일경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에 함북 지방으로 돌아와 임시정부 연통제를 조직하고 윤태선·이상호·전재일 등 수십명의 조직원과 함께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돼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만주로 다시 건너가 1925년 길림성 화전현에서 이탁·지청천·김이대 등이 조직한 정의부에 가입, 무장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특히 그는 1926년 4월부터 고인섭과 함께 봉천, 개원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일경의 밀정처단 등 활동을 하다 1927년 2월12일에 개원성 동문 밖에서 체포돼 신의주로 압송됐다.

그는 결국 27년 12월 5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43년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체포돼 길림성 형무소에서 옥사(1944년)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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