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 아동문학가 김성도

  • 입력 2005-08-25   |  발행일 2005-08-25 제22면   |  수정 2005-08-25
대학 1학년때'어린 음악대'발표
따따따♬ 따따따♪주먹손으로♬∼
경산 하양 출신…계성학교 부임후 왕성한 활동
안데르센동화 번역출간·글짓기 대회 열풍 주역
[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  아동문학가 김성도
1974년 대구청년회의소가 주관한 아동백일장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아 심사평을 하고 있다.

"따따따 따따따 주먹손으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 가지요." 어린 시절, 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소년기를 보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린 음악대'의 노랫말과 곡을 만든 김성도는 잘 알지 못한다 해도 "따따따 따따따 주먹손으로…" 노래는 누구에게든 어린 시절의 한때를 떠올리게 하는, 마치 처마 밑을 비추고 있는 5월의 햇살처럼 전 국민의 가슴 속에 애틋하게 남아있다.


김성도는 1914년 경산군 하양면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28년 하양초등학교를 졸업, 계성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반의 김동리는 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김성도는 60리 길을 통학했다. '하양 비단장수의 아들'로 김성도는 김동리에게 인식돼 있었다. 당시 그가 태어난 와촌은 외부세계와 거의 단절된 곳이었다. 당시 유일한 문화적 자산은 교과서 뿐이었다.

계성학교에서 김성도는 '아이생활' '새벗' '소년' 등을 접하게 되었고 이어 '별나라' '소년' 등에 작품을 투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라 할 수 있는 15세에 그는 아동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연희전문 1학년이던 34년, 그는 '어린 음악대'를 작곡, 악보를 등사해서 각 학교로 배부했고 이것이 방송을 타게 되면서 마침내 전국적인 노래가 되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김성도는 백낙준 박사의 배려로 함흥 영생중학교에 6년간 재직하면서 강소천, 김영일 등과 교우를 가졌다. 그러나 작품 활동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 모두가 불우했던 그 시대를 침묵으로 항거한 것이다.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강소천의 '호박꽃 초롱' '보슬비' 등도 그 무렵 김성도가 곡을 붙인 노래였다.

55년 계성학교에 부임한 김성도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동요를 본 윤석중이 "푸근한 맛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 동시에서 동화로 바꾸었다. 57년 이응창과 함께 대구아동문학회를 창립한 김성도는 그 이듬해 '안데르센동화전집' '그림동화전집' 등을 직접 번역 출판, 한국 아동문학계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주관한 계성학교 개교 50주년기념, 영남일보 후원으로 실시한 '경북도내 글짓기 대회'는 첫해부터 도내 초등학교에 글짓기 열풍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행사는 그 후 20년간 계속되면서 대구·경북권의 아동문학이 전국적 강세가 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60년대, 남산동 선교사 사택 부근의 자그마한 산파(産婆) 간판이 붙어있는 김성도의 자택은 초창기 대구·경북 아동문학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아동문학회의 모임이 끝날 무렵이면 회원들은 약속한 듯 일제히 "따따따 따따따 주먹손으로"의 어린 음악대 합창으로 폐회했다. 그것은 무언의 규칙이자 김성도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어진길'이란 호가 있었지만 김성도에게는 동요시인, 동화작가, 아동문학번역가, 동요작곡가란 별칭이 있었다. 그의 표정은 늘 온화했고 깊고 폭 넓은 사고를 지닌, 해바라기 같은 동화작가였다. '색동' '복조리' '별똥' '꽃씨와 인형' 등의 작품집을 통해 그는 최초로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를 개작하는 형식의 작품을 많이 썼다. 세 자녀 훈이, 돈이, 영이를 작품 속에 실명으로 등장시켜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눈에 비쳐진 어른들의 세계도 보여주려 했다. 많은 동요에 곡을 붙였던 그는 작품 속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인용했으며, 음악에 대한 못다 이룬 꿈을 세 자녀를 통해 성취하고자 실제로 상당 수준의 음악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여생은 순탄치 못했다.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장남을 교통사고로 잃었고 고혈압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할 때 시지동 아파트 붕괴사고란 끔찍한 일을 당했다. "우리에겐 작으나 크나 제각기 운명의 문이 앞에 놓여 있다." 초기 작품인 '담 밖에서 듣는 희망음악회'에서 그가 한 말이다. 86년에 작고한 그는 내리워진 운명을 침묵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65년 제4대 경북예총회장을 역임했으며 81년 계성문학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지냈다. 88년 경산문학회(회장 김윤식)에서 건립한 어린 음악대의 '김성도 노래비'가 그의 출신학교인 하양초등 숲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다.

[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  아동문학가 김성도
창작동화집 '하나 둘 셋'의 표지.
[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  아동문학가 김성도
1972년 가족과 함께 포항을 찾아 기념촬영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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