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2]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임제와 한우<하>

  • 김봉규
  • |
  • 입력 2016-04-21   |  발행일 2016-04-21 제22면   |  수정 2016-06-17
밤비에 새잎 나거든
이은상이 소동파보다 높이 평가한 천재시인…임제 가는 곳엔 詩·술·여인
20160421
임제가 아들들에게 남긴 ‘곡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새긴 ‘물곡사비(勿哭辭碑)’. 임제의 고향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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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기념비(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뒷면에 노산 이은상이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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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의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는 백호문학관.


임제는 어떤 인물
자유분방해 예법 구속받지 않아
편가르고 질시하는 관직에 환멸
곳곳 유람하다 39세에 세상 하직
中 사대주의 비판 ‘물곡사’ 유언

임제는 어떤 인물
자유분방해 예법 구속받지 않아
편가르고 질시하는 관직에 환멸
곳곳 유람하다 39세에 세상 하직
中 사대주의 비판 ‘물곡사’ 유언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는가/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임제가 황진이 무덤 앞에서 지은 시다. ‘해동가요’에 ‘송도의 명기 황진이의 무덤을 보고 이 노래를 지어 조문하다(見松都名妓 黃眞伊塚上 作詞弔之)’라는 기록이 있는 작품이다. 임제가 1583년 평안도 도사(都事)로 부임해 가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잔을 올리고 이렇게 시를 읊으며 넋을 달랬던 것이다.

황진이가 살아있을 때 임제와 만났다면 어떤 이야기를 남겼을까 궁금해진다. 임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중용을 800번 읽은 임제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시인인 임제의 호는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痴), 겸재(謙齋) 등이다.

1549년 나주에서 태어난 임제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하다가 20세에 이르러 학문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과거시험 위주의 글에는 흥미가 없던 그는 22세 때 속리산에 있던 재야학자 성운(成運)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스승은 격정적이고 분방한 임제의 성격을 바꿔보고자 중용을 1천 번 읽을 것을 주문했다. 임제는 지리산의 한 암자에서 중용을 800번 읽는다. 6년 동안 이렇게 공부하다가 속리산을 떠나면서 다음의 시를 읊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山不離俗俗離山).’

임제는 1577년 1월 속리산에서 하산한 후 그해 9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 서북도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 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후에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서 1587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주변 오랑캐 나라들이 다 제왕이라 칭했는데도, 유독 우리 조선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이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의 내가 살아간들 무엇을 할 것이며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울 일이 아니니 곡을 하지 마라(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는 유언을 남겼다. 임제의 ‘임종계자물곡사(臨終誡子勿哭辭)’다.

“임백호(林白湖) 제(悌)는 기개가 호방하여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그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여러 아들들이 슬피 우니 그가 말하기를 ‘사해(四海)의 모든 나라가 제(帝)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우리만이 예부터 그러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누방(陋邦)에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 곡하지 마라(四海諸國 未有不稱帝者 獨我邦終古不能 生於若此 陋邦 其死何足借命 勿哭)’고 하였다. 그는 또 항상 희롱조로 ‘내가 만약 오대(五代)나 육조(六朝)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천자(天子)쯤은 의당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임제, 조선의 가장 뛰어난 천재시인

임제는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추모 시조를 읊고 술잔을 올리는 등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인물’이라고 평했으며, 또 한편에서는 ‘법도 밖의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이런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됐다.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으며, 문집으로는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이 있어 벼슬에 높이 오르지 못하였으며, 선비들은 그를 법도 밖의 사람이라 하여 사귀기를 꺼려하였으나, 그의 시와 문장은 서로 취하였다.’

검(劍)과 퉁소, 거문고를 항상 지니고 다녔던 임제는 풍류남아이고, 자유분방한 시인이었다. 가는 곳마다 여인이 있고, 술이 있고, 시가 있었다. 모르는 기생이 없고, 발길이 가지 않은 명승이 없었다.

천재시인으로 불리던 임제에 대해 노산(鷺山) 이은상(1903~82)은 “구금(拘禁)을 미워하고 방종(放縱)을 즐겨했던 사람은 소동파보다는 오히려 시인 임백호 선생을 더 높이 평가한다”면서 “조선왕조 500년에 가장 뛰어난 천재시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는 백호 임제 선생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무어별(無語別)’에도 그런 기질과 재능이 잘 나타나 있다.

‘열다섯 갓 넘은 어여쁜 아가씨(十五越溪女)/ 수줍어 말 못하며 임을 보내고(羞人無語別)/ 돌아와 겹겹이 문 닫아 걸고는(歸來掩重門)/ 달빛 가득한 배꽃 보며 눈물 짓누나(泣向梨花月)’

임제가 나이 어린 기생에게 부채에 써준 다음 시도 멋지다. 이 기생은 평생토록 임제를 그리며 항상 그 부채를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한겨울에 부채를 준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마라(莫怪隆冬贈扇枝)/ 이 마음을 너는 아직 어리니 어찌 그 뜻을 알랴마는(爾今年少豈能知)/ 그리움으로 한밤에 가슴에서 불이 일어나면(相思半夜胸生火)/ 한여름 염천의 무더위가 비길 바 아니니라(獨勝炎蒸六月時)’

현재 백호임제선생기념비(1979년 건립)와 임제 시비, 물곡사비 등이 그가 태어난 나주시 다시면 회진(會津)마을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그 뒤쪽 위에는 임제가 선비들과 시를 짓고 하던, 임제의 할아버지인 귀래정(歸來亭) 임붕(1486~1553)을 기려 1556년에 지은 영모정(永慕亭)이 자리하고 있다. 영모정 앞으로는 영산강이 펼쳐진다. 백호문학관과 나주임씨 대종가도 근처에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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