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영화 ‘가려진 시간’ 감독 엄태화

  • 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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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25   |  발행일 2016-11-25 제43면   |  수정 2016-11-25
“대구 개구리소년 실종과 세월호 참사…무의식중 이번 영화에 투영됐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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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가 또 한 명의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을 배출했다. 강동원 주연의 영화 ‘가려진 시간’은 엄태화 감독(35)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참신하고 기발한 소재에 장르적 실험을 가한 이 영화에서 엄 감독의 신인다운 패기와 열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려진 시간’은 섬마을에서 일어난 의문의 실종 사건 후 비밀스러운 시간에 갇혀 며칠 만에 어른이 돼 나타난 성민(강동원)과 유일하게 그를 믿어주는 소녀 수린(신은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감성 판타지 영화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진실을 외면한 세상과 그와는 반대로 서로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켰던 성민과 수린의 모습이 판타지적 설정과 현실적 전개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2012년 단편 ‘숲’ 미장센영화제 大賞
대구단편영화제서도 우수·촬영·연기상
‘잉투기’ 이어 기발한 소재 ‘가려진 시간’
탄탄한 스토리와 현실 오버랩 장면 화제

“처음부터 강동원 염두 두고 쓴 시나리오
첫 연기서 매력 발산 신은수 ‘신의 한수’
영화 ‘밀정’ 日경찰역 엄태구가 친동생
‘제2의 류승완·승범 형제’란 평가 영광”

“평소 현실-비현실 부딪히는 얘기 관심
늘 새로운, 못보던 걸 찍는 감독되고파”



어른이 된 소년역에 비현실적 외모의 강동원을 캐스팅한 것이 주효했지만 ‘가려진 시간’은 주연배우의 화려한 비주얼에만 기댄 작품은 아니다. 긴장감을 유지하는 탄탄한 스토리와 사회 현실을 떠올릴 수 있는 장면으로 관객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가려진 시간’의 개봉을 앞두고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엄 감독은 “불신이 가득한 세상에서 믿을 수 있고 온전히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엄 감독은 2012년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한 단편 ‘숲’과 인터넷 공간과 현실을 오가며 이 시대 청춘의 이야기를 담아낸 ‘잉투기’로 한국 영화계의 떠오르는 신인으로 주목받았다.

친동생이 최근 영화 ‘밀정’에서 일본 경찰 하시모토 역으로 호평을 얻은 배우 엄태구다. 엄 감독은 그간 동생과 함께 자주 작업했고, 엄태구는 이번 영화에서 성민의 동갑내기 친구 태식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엄 감독과 엄태구는 충무로에서 ‘제2의 류승완-류승범 형제’로 불린다. 2012년 대구단편영화제에서 엄 감독이 연출한 ‘숲’이 우수상을, 이 영화에 출연한 엄태구가 연기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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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단편영화제와 인연이 있다.

“2012년에 ‘숲’이 촬영상까지 받았다. 단편영화를 찍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구단편영화제를 알고 있다. 영화제가 나름 알차게 운영된다. 나 또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보다 행사 기간은 짧은데 단편 위주로 좋은 영화가 상영된다.”

▶믿음과 그에 기반이 되는 조건 없는 순수한 첫사랑을 그렸다고 했다. 영화에서와 같은 순수함이 현실에서도 존재한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영화로나마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로 말하고자 한 게 꼭 첫사랑의 순수함만은 아니다. 어릴적 무엇이 됐건 각자가 믿을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게 첫사랑일 수도 있고, 산타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점차 불신이 커져간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피곤함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반발심도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작은 희망을 찾은 것이다. 내게도 그런(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면 좋지 않을까.”

▶어른이 된 소년 역할에 강동원을 캐스팅한 건 절묘했다. 배우가 의도대로 잘 따라줬나.

“200% 만족스러웠다. 성인 남자와 소년이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데 무엇보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위화감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된 소년으로는 강동원이 적역이었다. 강동원에겐 소년의 얼굴이 있다. 또 장난꾸러기 같으면서도 풋풋한 매력이 있다. 처음부터 강동원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신은수는 어떤 매력을 가졌는가.

“첫인상에서 그저 얼굴이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어떤 이야기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린의 외로움을 잘 표현할 것 같았다.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 얼굴 자체에서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캐스팅되기 위해) 일부러 어필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대범해 보였다. 촬영 현장에서 모든 스태프들이 자기만 쳐다보고 있을 텐데 그런 압박감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기 경험이 전혀 없었는데도 트레이닝을 시켜 수린 캐릭터를 만들어보고자 한 것이다. 신은수는 감성 자체가 타고난 아이다. 흡수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걸그룹 데뷔를 준비하던 기획사 연습생이었지만 앞으로 연기자로 잘 성장해나갈 것 같다.”

▶가려진 시간에 갇힌 것을 의미하는 장면에서 보여진 연출 기법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다. (영화는 성민이 짧은 시간에 어른이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주변을 움직임이 없는 세상으로 변화시켰다)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그 장면은 수린의 상상력 범위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니메이션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더 좋을 것 같다. 뭔가 만화적이고 어린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게 느껴진다면 좋겠다. 물론 관객들이 어떻게 보느냐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1991년 대구 개구리 소년 집단 실종사건이나 세월호 참사 같은 현실 사회의 모습이 오버랩된다는 얘기가 있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쓰는 와중에 벌어진 일들이 어떤 식으로든 무의식을 건드려서 영화에 투영됐을 수는 있다.”

▶동생과 작업을 같이 해 ‘제2의 류승완-류승범 형제’로 불린다. 동생의 연기를 어떻게 평가하나. 또 동생과 호흡할 때의 장단점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포함하면 동생과는 지금껏 일곱 작품을 함께했다. 우리가 류승완 감독님과 류승범씨의 후광을 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분들과 비교를 하다보니 주목을 해주는 게 있다. 감사한 일이다. 동생은 준비를 많이 하는 노력파 배우다.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연습하는 연습 벌레이기도 하다. 형제가 함께 작업을 하면 일단 편하다. 배우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 감독이 디렉션을 할 때 끄집어낼 수 있는 게 많다. 동생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효율적이다. 나쁜 점은 별로 없다. 다만 아예 남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을 신경 써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점이 다소 불편하다. 그런데 그것도 초반에만 그랬고 지금은 각자 맡은 일 열심히 하자는 분위기다.”

▶아역 캐스팅은 어떻게 했나.

“성인에 맞춰 아역을 찾았다.”(영화에서 강동원과 엄태구는 아역 배우들과 외모가 굉장히 닮았다)

▶첫 상업영화 데뷔작에 강동원을 캐스팅했다는 건 흥행을 노렸다는 걸로 생각되는데 그런 감이 있나.

“전혀 없다. 처음이니까 손익분기점(200만명)만이라도 넘었으면 좋겠다. 물론 더 잘되면 좋겠지만.”

▶해외 9개국에 선(先)판매됐다던데.

“강동원씨의 힘이다. 아직은 감독의 역량은 아닌 것 같다(웃음).”

▶본인의 작품 세계를 규정할 수 있나.

“아직은 나만의 작품 세계가 구축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박찬욱, 홍상수 감독처럼 자기 색깔이 뚜렷한 감독이 되는 게 아마 모든 감독의 꿈이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바람이 있다면 대중에게 저 사람이라면 뭔가 새로운 영화, 못 보던 영화를 찍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영화는 스스로 만족한다.”

▶어떤 소재에 관심 있나.

“앞으로 뭘 할지에 대해선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만 평소 현실과 비현실이 부딪히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잉투기’는 현실과 가상 세계가, ‘숲’은 꿈과 현실이 충돌하는 이야기였다. 이번 영화도 비슷하다. 소재적으로는 그런 류가 끌린다. 다루고 싶은 화두는 인간의 외로움이다. 외로운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보통 어디서 영감을 얻나.

“그때그때 다른데 ‘가려진 시간’은 멈춘 세계라는 소재에 우선 관심이 갔고, 그다음에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하다가 이미지를 보고 떠올렸다. 파도가 치고 있는 바닷가에 남녀가 마주 보고 서 있는 그림을 봤는데 마침 그 파도가 멈춰 있는 것 같았고, 그 두 사람에게 과연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반추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평소 만화를 즐겨 보는데 그러다 영감을 얻기도 한다.”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가 있나.

“많다. 강동원씨랑 또 해보고 싶다. 이번 영화 하면서 무지 즐거웠다. 동생과도 앞으로 자주 작업할 생각이다. 최민식, 송강호, 김윤석, 황정민 선배처럼 연기 잘하는 분들과 작업해보는 게 모든 감독의 바람 아닐까. 김혜수, 전도연, 손예진, 한효주 같은 여배우들과도 함께해보고 싶다.”

▶차기작 구상은.

“여러 가지 생각 중인데 딱 정해진 건 없다. SF 호러 장르 영화를 해보고 싶다.”

▶어떤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나.

“새로운 영화라는 기대감을 주면서도 새롭기만 한 영화가 아닌, 솔직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불리고 싶다. 추상적인데 드러내고 싶은 걸 솔직하게 드러낸, 연출자 스스로 솔직하게 대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런 영화를 선보이고 싶다.”

▶현실 고발 영화에는 관심이 없나.

“어떤 현상을 직접적으로 꼬집는 것보다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은유적으로 표현해서 사람들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현실을 고발해 통쾌함을 안기는 것도 좋지만 위로하는 영화도 필요할 것 같다.”

글=김명은기자 drama@yeongnam.com
사진제공=퍼스트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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