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방어선 전투 영웅·후손 평화의 손 맞잡았다

  • 마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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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2 07:07  |  수정 2019-10-12 08:10  |  발행일 2019-10-12 제5면
6·25전쟁 ‘303고지 희생자’ 추모행사
백선엽 장군·워커중장 손자 참석
303고지 미군포로 자녀도 한자리
나이·국적 초월 뜨거운 마음 나눠
20191012
11일 칠곡 왜관읍 아곡리 자고산 303고지 추모비 참배행사에 참석한 백선엽 장군이 엄마를 따라 참배하러 온 김소민양의 손을 잡고 있다. <칠곡군 제공>

6·25전쟁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반전의 기틀을 마련한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영웅과 그 후손이 칠곡에 모였다. 69년 전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당시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과낙동강 전선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사수해 인천상륙작전의 승리에 일조한 월턴 워커 중장의 손자가 11일 303고지 추모행사에 참석했다. 또 자고산 303고지에서 포로가 된 45명의 미군 중 북한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4명 가운데 한 명인 제임스 멜빈 러드 병장의 아들과 딸도 함께했다.

이번 행사는 6·25전쟁 당시 303고지에서 희생된 미군 장병의 희생을 기리고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 자리에는 백선기 칠곡군수를 비롯해 황인권 제2작전사령관, 엄용진 50사단장, 마크 티 심멀리 미(美) 19지원사령관, 스티브 길랜드 미 2사단장 등 한미 주요 지휘관과 장병 160여명도 자리를 지켰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 추모행사를 알게 된 전은희씨가 유치원생인 딸 김소민양과 자발적으로 헌화 행사에 동참해 눈길을 끌었다.

백선엽 장군이 행사장에 입장하자 한·미 현역 장병은 일제히 기립해 거수경례로 예를 표했다. 이에 백 장군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경례로 답했다. 전투약사 보고로 시작된 이날 행사는 자고산 희생자를 위한 기도, 추모비 참배, 기념촬영 순으로 이어지며 희생자의 명복을 빌었다. 미 육군은 SNS를 통해 라이브로 이날 행사를 생중계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몇 달 후면 100세가 되는 백선엽 장군, 60대의 백선기 칠곡군수와 워커 중장의 손자, 러드 병장의 50대 아들, 워커 중장의 30대 증손녀, 6세 김소민양이 함께 손을 맞잡는 장면이다. 나이와 국경, 세대와 성별을 달리하는 5세대가 손을 맞잡자 행사에 참석한 내빈들은 감동하는 표정이었다. 초면임에도 6·25전쟁과 낙동강을 통해 맺어진 인연이어서인지 예전부터 마치 알아왔던 사람처럼 친근해 보였다. 69년 전 이곳을 지켰던 참전용사와 그의 후손, 현재 이곳을 가꾸어 가는 군수, 또 앞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미래세대가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백선엽 장군은 “고향이 함경도이지만 제2의 고향은 칠곡이다. 부하들이 잠들어 있는 칠곡에 묻히고 싶다는 염원으로 낙동강이 보이는 칠곡 땅을 매입하기도 했다”며 “지금도 부하의 울부짖음으로 밤잠을 설친다”고 했다.

워커 가문은 3대에 걸쳐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워커 중장에 이어 아들 샘 워커도 6·25전쟁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은성훈장을 받았다. 이번에 칠곡을 찾은 워커 중장의 손자이자 샘 워커의 아들인 샘 심스 워커 역시 한국에서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했다. 칠곡군은 대를 이어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데 대해 명예군민증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303고지 생존자 러드 병장의 아들 스테판 더들라스는 “아버지가 지금도 303고지를 이야기하면서 눈시울을 적신다”며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악몽과 아픔을 지켜보았기에 한국전쟁은 남의 전쟁의 아닌 우리 가족의 전쟁이었다”고 했다.

백선기 군수는 69년 전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칠곡군을 호국과 평화의 성지로 가꾸어 가고 있다. 호국 관련 각종 인프라를 구축하고 낙동강세계평화 문화 대축전 등을 통해 보훈을 실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 논쟁이 아닌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일부의 반대에도 백선엽 장군에게 명예군민증을 수여하는 등 그는 자신의 믿음과 소신을 지키고 있다.

전은희씨는 자신의 딸을 유치원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303고지로 달려 왔다. 그는 “딸에게 누가 이 땅을 지켰는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희생됐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알기나 한 듯 딸 소민양은 스스럼없이 백 장군에게 다가서며 손을 잡기도 했다. 한 세기라는 세월의 벽도 이들의 소통을 막지 못했다.

백 군수는 “이날 행사는 승리를 자축하거나 상대를 비방하며 이념을 내세우는 행사가 아니다. 단지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리고 전쟁의 잔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자리”라며 “이들의 희생과 아픔이 잊히지 않는다면 이 땅에 평화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칠곡=마준영기자 mj3407@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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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사수해 인천상륙작전의 승리에 일조한 월턴 워커 중장의 손자와 증손녀가 303고지 추모비 참배 행사에 참석해 헌화하고 있다. <칠곡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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