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청도 풍각면 풍각장

  • 임성수
  • |
  • 입력 2020-01-17   |  발행일 2020-01-17 제36면   |  수정 2020-01-17
장터 가는 길엔 작은 도서관이 된 옛 면사무소

풍각면(豊角面)의 월스트리트는 차들로 빼곡했다. 이리저리 아무리 기웃거려도 빠끔한 자리 하나를 찾지 못했다. 역시 장날이어서 인가, 면 소재지여서인가. 번화가를 살짝 벗어난 한산한 밭 곁에 주차를 한다. 밭에는 미세한 파란 것들이 송송 고개를 내밀었고 늘어진 전깃줄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조르라니 앉았다. 산들은 운무에 싸여 보이지 않았고 면 소재지의 이면에 펼쳐진 밭은 아주 넓어 보였다. 비슬산, 수복산, 묘봉산 등의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땅. 그 산들에서 바라보면 마치 소뿔(牛角) 사이처럼 넓고 풍성(豊)해 풍각(豊角)이라 한단다. 오늘 소뿔은 보이지 않지만 그 사이 넓음은 알겠다. 장터로 향한다. 분명 장터로 가는 것이 분명한 할머니를 살랑살랑 따라간다. 할머니는 보행보조기를 양손으로 밀며 천천히 가신다. 부슬비 속을, 지구를 미는 듯이.

소뿔의 사이처럼 넓고 풍성한 '풍각'
일제때 지은 면사무소가 도서관 변신
얼핏 박공지붕 기차역으로 보이기도
앞마당엔 중요 구조물 위치 '수준점'

지역 최초 세운 예배당 풍각제일교회
차례 기다리는 줄이 긴 소머리 국밥집
깨 볶는 방앗간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
1·6일 열리는 풍각 장날 정겨운 풍경


◆구 풍각면사무소

1
도서관이 된 옛 풍각면사무소. 등록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2020011701000415600016915
옛 풍각면사무소 앞마당에 있는 수준점. 부근의 높이를 결정하는 측량의 기준이 되는 점이다.

할머니를 쫓아 장터로 가던 골목길에서 눈에 익은 건물을 본다. 일제 강점기 때의 역사(驛舍)와 닮았다. 아니, 아예 똑같아 보인다. 장방형의 평면에 박공지붕, 전면의 돌출된 현관 포치, 목재비늘판벽의 외벽, 대칭을 이루는 목재 오르내리기창이 딱 그 모습이지 않나. 가만히 보니 미묘하게 조금 더 크다. 출입구가 더 많다. 아, 지붕의 박공부분을 모 죽임 한 맞배지붕이구나. 박공 부분에는 여러 단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환기창을 두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어떻게 여는 것인지 짐작이 안 간다. 어쩌면 채광을 위한 천창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에 기차가 섰을 리는 없다.

건물은 옛날 풍각면사무소였다고 한다. 1930년대에 건립되어 2007년까지 면사무소로 쓰였다. 건물은 2006년에 등록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청도 작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기존의 면사무소는 2007년 인근에 신청사를 지어 옮겼다. 도서관에는 8천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 상영, 다문화 가정을 위한 한글 공부방 등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앞마당에 수준점(水準點)이 있다. 부근의 높이를 결정하는, 측량의 기준이 되는 점이다. 국도 및 도로에 수준 표석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중요한 구조물의 위치에 수준점을 설치하기도 한다. 닳은 화강석과 주변의 강돌들이 구석기적이긴 하지만, 이 건물이 일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물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대구경북 최초 예배당 '풍각제일교회'

2020011701000415600016916
풍각제일교회 예배당과 120주년 기념관. 대구경북 시골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예배당이라고 한다.

도서관 앞에 파출소가 있고, 길을 건너면 풍각 장터다. 갑작스러운 요의에 파출소 옆 농협 화장실을 얻어 쓰면서 젊은 직원들의 해사한 얼굴을 스친다. 길을 건너려다 몇 걸음 떨어진 하늘에 박힌 십자가를 발견한다. 풍각제일교회다. 풍각면소재지가 송서리여서 송서교회라고도 한다. 핑크빛이 살짝 도는 산뜻한 아이보리의 외벽에 감빛 아치형 입구를 가진 건물이다. 정면 외벽에 한자로 예배당이라 쓰여 있다.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가운데 신랑과 양쪽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기본 바실리카 형식의 평면으로 보인다. 풍각제일교회는 대구 경북 시골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예배당이라고 한다.

풍각면소재지에서 동쪽의 청도천을 건너면 이서면 가금리다. 원래 장은 1830년부터 가금리에서 열렸다고 한다. 그 장터 앞 2칸 초가집을 예배당으로 삼은 것이 풍각제일교회의 시초다. 1899년이었다. 이후 두어 군데를 옮겨 다니다가 1906년 현재의 자리에 예배당을 건립하고 일신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 대해 대구 교회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인 부해리 선교사의 편지가 남아 있다. '풍각면에서는 한겨울 내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멋진 교회당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누군가는 땅을 팔아 기부하고 누군가는 오래된 벽을 허물다가 엄청난 돈이 담긴 단지를 발견해 기부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풍각제일교회는 한국기독교 사적 제3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옛 예배당 옆에 2019년 2월에 준공한 120주년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 시절을 지나지도 않았는데 생각하면 아련히 등이 아프다.

◆1·6일은 풍각장 열리는 날

2020011701000415600016912
1·6일이 장날인 풍각장은 1960~70년대 청도에서 가장 큰 오일장이었다.
2020011701000415600016913
고소한 연기 날리는 송서방앗간.
2020011701000415600016914
난로 앞에서 곱은 손을 문지르는 모습이 기원의 비손 같다.

장터 입구 건물 계단에 냉이 두 무더기와 약간의 생강을 펼쳐놓은 할머니가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앉아 계신다. 그 옆에는 또 다른 할머니가 역시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앉으셨다. 두런두런한 대화 속을 비는 속도 없이 끼어든다. "내가 여기서 25년이야. 오뎅 봐, 깨끗하잖아? 맛이 달라, 맛이." 즉석 어묵집 아저씨의 호탕한 말 끝 시선이 맞은편 청년들의 마차에 찰나로 닿았다가 돌아온다. 여기저기 작은 모둠으로 쌓인 매끈한 고구마와 붉은 흙을 휘두른 싱싱한 생강들, 새파랗게 기지개를 편 시금치가 단연 겨울 장터의 모습이다.

장터가 가금리에서 이곳 송서리로 온 것은 1920년쯤이라 한다. 풍각장의 전성기는 1960~70년대였다. 우시장도 있었다. 그 시절 청도군내의 각북, 각남, 이서는 물론 경남 창녕과 밀양, 경산 등지에서 모여든 장꾼의 수가 3천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풍각장은 청도에서 가장 큰 장이었고, 청도군 경제의 중심지였다. 지금 장터에는 박공지붕의 장옥들이 일렬로 서 있고 위에는 아케이드가 설치되어 있다. 각종 농기구점, 생선가게, 화장품가게, 씨앗가게, 비로드 장갑과 꽃버선 등의 잡화를 파는 가게, 반찬가게, 철물점, 겨울이라 약간은 구색이 부실한 과일가게, 각종 구제 물품을 파는 코너도 있다. 누군가는 때가 잘 빠진다는 직접 만든 비누를 펼쳐 놓았다. 물론 빈 장옥과,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셔터를 내린 골목도 있다.

오늘 잡은 소·돼지 고기 식당에는 손님이 잦다. 텔레비전에 나와 유명하다는 소머리 국밥집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길다. 간판도 없는 집, 옛날 어머니가 하시던 곳에서 어머니가 하시던 그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저래가 언제 먹겠노." 한 아저씨가 모퉁이에서 흘끔 쳐다보고는 미련 없이 돌아선다. 칼국수 집에서 풍겨 나오는 들깨 향에 가게 문을 열어 보지만 자리가 없다. 싸아~ 싸아~ 파도소리 같은 깨 볶는 소리 들린다. 송서 방앗간의 하얀 연기가 고소하다. 생선 가게 옆 까만 난로 앞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곱은 손을 문지르는 모습이 기원의 비손 같다.

송서리에서는 매년 음력 설 이후 첫 번째풍각장이 서는 날에 동제를 올린다고 한다. 풍각면 전체가 잘 되려면 면소재지이자 마을의 입구인 송서리가 잘돼야 한다는 믿음이 있단다. 장터 골목에서 보행보조기를 밀며 걷는 할머니를 다시 만난다. 가끔은 노인들의 힘이 지구를 자전시키는 것이 아닌가 할 때가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대구 수성구 파동에서 가창으로 간다. 가창저수지 쪽으로 들어가 헐티재를 넘어 각북으로 가거나, 가창에서 팔조령터널 지나 청도 이서로 들어간다. 각북으로 들어오면 902번 지방도, 이서로 들어오면 20번 국도를 타고 창녕, 풍각 방향으로 가면 된다. 풍각 장날은 1·6일이다. 청도 작은 도서관은 월요일 휴관이다.

위클리포유인기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