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1] 고려 국존에 추대된 일연 선사(1206~1289)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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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21   |  발행일 2020-05-21 제12면   |  수정 2020-12-01
비슬산서 37년간 수행…삼국유사 찬술 토대 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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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비슬산 대견봉에 위치한 대견사 전경. 달성군과 동화사는 2014년 3월1일 대견사를 중창 낙성하면서 이 절을 일연이 주석했던 보당암으로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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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비슬산 천왕봉 아래 자리를 잡고 있는 도성암. 도성암 위쪽에 위치한 바위는 삼국유사에 실린 '관기와 도성' 이야기의 주무대로 알려져 있다.
대구 달성은 명실상부한 인재의 고장이다. 우리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고려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달성의 인물들은 시대 정신을 일으켜 세우며 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다. 특히 학문을 숭상하는 유학적 기풍이 뿌리 깊게 내려 학식과 인품을 갖춘 선비들이 많았다. 여전히 달성에는 이들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는 가문들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무엇보다 달성 출신 인물들은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들은 항상 몸을 낮춰 충·효·애(忠·孝·愛)를 실천하고 불의에 대항했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들의 올곧은 정신문화는 시대와 지역을 넘어 독특한 유무형 자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남일보는 이들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시리즈를 11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고려 희종2년 지금의 경산서 출생
1218년 강원도 양양 진전사로 출가
승과 급제후 비슬산 보당암 주지로

오어사 등 거쳐 1264년 인흥사 주석
삼국유사와 관련된 역대연표 제작
지눌 정통 승계한 당시 불교계 1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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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비슬산자연휴양림에는 삼국유사를 품에 안고 있는 일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달성의 인물을 논할 때 일연(一然·1206~1289) 선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비록 달성에서 나고 자라진 않았으나 꽤 깊은 인연을 맺었다. 불교 과거(科擧)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뒤 처음 부임한 곳이 달성이고, 비슬산에서만 37년간 수행했다. 그에게 있어 달성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시리즈 1편에서는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에 새겨진 내용을 토대로 일연이 달성에 남긴 흔적을 되짚어 본다.

#1. 혼돈의 시대 불교에 귀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한 일연의 삶은 명성에 비해 알려진 내용이 극히 제한적이다.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불교계 최고의 위치인 국존에까지 오른 것을 감안하면 분명 아쉬운 대목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군위 인각사(麟角寺)에 세워진 비의 내용이 전부다. 이외에 다른 기록이 없어 그의 생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없다. 그나마 인각사 보각국사비에는 단편적이지만 일연의 일생이 담겨져 있다.

보각국사비에 따르면 일연은 고려 희종 2년 6월 신유일에 경주 장산군에서 태어났다.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 제국을 건설한 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대장경 판각사업에 참여하고 삼국유사를 쓰게 된 것은 어쩌면 그의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장산군은 지금의 경산시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불가에 출가하기 전 그는 견명(見明)이라 불렸다. 모친이 환한 해가 자신을 비추는 꿈을 꾼 뒤 그를 잉태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유년시절부터 그는 남달랐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용모와 거동이 단정하고 엄숙했으며, 범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살필 만큼 당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9세 때부터는 해양(현 전라도 광주) 무량사에서 배움을 시작했다. 1214년(고종 1년)의 일이다. 장산군에서 멀리 해양까지 가서 수학한 것은 어떠한 연(緣)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년 뒤 그는 설악산 자락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출가했다. 무신정권 혼돈의 시대, 불교에 귀의한 것이다. 당시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진전사는 절터로만 남아있다가 2005년 복원이 시작돼 4년 만에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진전사 인근에는 우리나라 제일의 관음도량인 낙산사를 비롯해 신흥사, 백담사, 봉정암, 오세암 등 이름난 절들이 자리 잡고 있다. 당시 일연은 선종 승려였지만 다른 종파의 교리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보각국사비에도 '선방을 두루 다니면서 참선해 명성이 매우 높았다. 당시 무리들이 받들어 구산중의 사선의 우두머리로 삼았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2. 선불장 장원 이후 비슬산으로

일연은 1227년(고종 14년) 개경(開京)에서 치른 스님들의 과거 선불장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진전사에서 경전과 참선 공부는 물론 주변 사찰을 다니며 여러 종파에 대한 지식을 쌓은 것이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달성과의 첫 인연을 맺는다. 초임지로 비슬산 보당암에 오게 된 것이다. 수도권 지역의 이름 있는 사찰에 가지 않고 달성으로 향한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보당암 부임은 그가 수행 생활의 절반을 비슬산에서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보당암은 일연이 꽤 오랜 시간 머물렀던 사찰로 의미가 남다르다. 수행과 득도, 국존이 되기까지 모든 활동의 기초를 닦은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보당암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확하다. 실증할 수 있는 뚜렷한 자료가 없어서다. 다만 1478년 조선조의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에 '비슬산 정상에 한 암자가 보당'이라 기록돼 있다. 이 구절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비슬산의 정상을 천왕봉으로 볼지, 대견봉으로 볼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관측 결과로는 천왕봉이 1천83m로 대견봉(1천58m)보다 높다. 반면 조선시대까지 기록을 보면 대견봉을 비슬산 정상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조선 영조 때 어명(御命)으로 편찬한 여지도서의 경상도 현풍면 산천조에는 대견봉을 비슬산 최고정으로 서술했다.

천왕봉 아래 도성암 주변에 보당암이 존재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으나, 대견봉에 위치한 대견사를 보당암의 전신으로 판단하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아예 달성군과 동화사는 2014년 3월1일 대견사를 중창 낙성하면서 이 절을 일연이 주석했던 보당암으로 공표했다.

보당암에서 주석한지 9년째 되던 해(1236년) 일연의 신변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해 몸을 피해야만 했다. 몽골의 3차 침입이었다. 비문에 따르면 당시 그는 오자주(五字呪)를 외우며 문수보살에게 지혜를 구했다. 그의 절박한 기도가 통했던 것인지 문수보살은 벽에서 몸을 나타내 '무주 북쪽에 있으라'고 계시했다고 한다. 이듬해 일연은 무주 인근의 묘문암으로 피신한 뒤 무주암으로 또 한 번 거처를 옮긴다. 이 시기 일연은 깨달음을 얻고 삼중대사라는 법계를 받았다. 비슬산 묘문암과 무주암에 대한 기록은 보각국사비문 외에 남아 있지않다. 보당암과 인접하면서 은신이 가능한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3. 비슬산서 삼국유사의 토대 마련

그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44세 때였다. 1249년 경상도 남해의 정림사(定林社)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무신집권자 최이의 매제인 정안이 대장경조조를 위해 일연을 초청한 뒤 사찰의 운영과 함께 분사대장도감의 사업을 맡겼다. 막중한 국책사업을 맡을 정도로 그의 능력이 뛰어났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일연은 정림사와 길상사에 주석하면서 대장경조조사업은 물론 불교서적 편술과 출판 작업도 병행했다. 이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일연은 고종에 의해 대선사로 보임됐다. 특히 당시 일연은 강화도의 중심사찰인 선월사의 주지로 임명, 보조국사 지눌의 정통을 승계하며 불교계 1인자로 인정받았다. 비슬산에서 발신해 당대 최고의 승려가 된 것이다.

무신정권 잔당들의 발호로 왕권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자 일연은 영남지역으로 향한다. 포항 항사사(현 오어사) 주지를 역임하고, 1264년 다시 비슬산으로 돌아왔다. 보각국사비문에는 인홍사 주지 만회가 스님에게 주지 자리를 사양하니 학식 있는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일연은 인홍사를 인흥사로 개칭하고 삼국유사와 관련된 '역대 연표'를 제작했다. 삼국유사 찬술(纂述)을 위한 선행 작업이 비슬산에서 이뤄진 셈이다. 이 역대연표의 일부는 현재 합천 해인사 사간판에 보관돼 있다. 삼국유사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집필 기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가 비슬산에서 삼국유사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니다. 실제 일연은 비슬산에서만 1227~1249년, 1264~1277년 두차례에 걸려 37년의 세월을 보냈다. 삼국유사 내용에도 그가 머물렀던 절집들이 소개되고 있다.

78세의 나이로 국사에 책봉된 일연은 1년 만에 귀향한다. 70여 년간 홀로 계신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함이었다. 이듬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일연은 인각사에서 주석하며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문헌=비슬산의 도인 일연선사, 홍종흠, 민속원. 일연 비슬산 37년(대견사 중창 1주년 기념 학술집), 일연 삼국유사를 쓴 뛰어난 이야기꾼, 고운기·장선환.

▨자문=송은석 대구문화관광해설사

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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