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에서 꽃피운 역사인물 .2] 참된 선비 한훤당 김굉필(1454~1504)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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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04   |  발행일 2020-06-04 제12면   |  수정 2020-06-04
말보다 행동…조선 성리학 정통 계승한 '실천하는 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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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현풍면 다람재에서 내려다 본 도동서원 전경. 조선 초기 도학자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은 2019년 7월 전국 8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진유(眞儒)가 동방에서 나와 도학(道學)이 여기에 전해지게 되니,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달성 도동서원 옆 비각 내부 신도비에 적힌 구절이다. 진유, '유학의 진리를 터득한 참된 선비'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일컫는다. 조선 전기의 도학자인 그는 평생 '몸가짐을 바로 세우는 일'에 몰두하며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칭했다. 말보다 행동을 중요시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특히 그는 정몽주(鄭夢周)에서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을 거쳐 조선 성리학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진실된 말과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2편에서는 실천하는 도학자 김굉필의 삶에 대해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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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뒤편에 위치한 한훤당 김굉필 묘소. 뒤편에는 한훤당의 아내 정경부인 순천 박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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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현풍읍 지리에 자리잡은 한훤당 고택은 안채의 평면 구성이 다른 지역에서 찾기 힘든 겹집 형태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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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재에 있는 한훤당 노방송 시비.

◆유교의 시대, 참된 선비로

김굉필은 단종 2년(1454) 5월, 한양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증조부 때부터 현풍현을 주 근거지로 삼았으나 조부 김소형(金小亨)이 개국공신 조반(趙반)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갖게 됐다. 아버지 김유(金紐)는 어모장군 행충좌위사용(禦侮將軍 行忠佐衛司勇)을 지냈고, 어머니는 추원부사(樞院副使) 한승순(韓承舜)의 딸 청주 한씨다.

김굉필이 살았던 조선 전기는 왕권 교체와 정치 문제 등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특히 나라의 근간을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삼국시대 도입된 불교는 이땅에 1천년 이상 뿌리내린 터라 유교적 질서의 기반 확립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뜻있는 선비로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은 시대였다.

김굉필은 어려서부터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영기가 빼어났으며, 정의감이 투철했다고 한다. 무례하게 굴거나 남을 조롱하는 이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바로잡아야 했다. 나이가 많아도 예외는 없었다.

신도비에 따르면 그는 창려집(昌黎集)을 즐겨 읽었는데,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敍)에서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을 부르며 이르기를, '남팔(南八)은 남아(男兒)이니 죽을 뿐이다. 불의(不義)에 굽혀서는 안 된다'고 한 부분을 반복해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종 3년(1472) 19세가 된 그는 백년가약을 맺는다. 합천군 야로현 말곡 남교동에 사는 순천 박씨에게 장가를 든 것. 김굉필은 결혼한 뒤 처가 근처 개울가에 조그만 서재를 짓고 이름을 '한훤당'이라 붙였다. 차갑고 따뜻한 공부방, 한훤당은 김굉필의 호이기도 하다. 김굉필의 자는 대유(大猷)였으나 스스로는 사옹(蓑翁)이라 불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사옹은 비 올 때 입는 도롱이다. 비에 젖은 겉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한훤'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소학(小學)에 심취하다

김굉필이 본격적으로 수학에 나선 건 점필재(점畢齋) 김종직을 만나면서다. 김종직이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함양군수로 내려오자 김굉필은 그에게 배움을 청한다. 이때 일두(一두) 정여창(鄭汝昌)과도 인연을 맺는다. 김종직은 사림을 정치 세력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사림은 학문하는 선비들의 무리를 일컫는데 사림파는 왕실의 공신 집단인 훈구파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통한다. 사림파의 기원은 고려 말 온건개혁파 정몽주에서 길재로 이어졌고, 김숙자를 거쳐 다시 김종직으로 학통을 이어왔다.

김굉필이 김종직을 찾아간 시기는 성종 즉위 직후였다. 당시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소학'을 주며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의 기상(氣像)이 모두 이 가운데에 있다"고 했다. 소학은 아동 교육서로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은 책이다. 반면 김종직이 설파한 소학은 대학(大學)을 접하기 전 읽어야 하는 입문서가 아닌 인륜 도리를 꿰뚫고 실천해야 할 학문이자 윤리였던 것이다. 이에 김굉필은 소학을 깊이 파고들었다. 글자 한 자 한 자, 글이 내포하고 있는 뜻까지 모두 가슴에 새겼다.

특히 김굉필은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수신(修身)'에 치중했다. 수신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유학을 완성시키는 것이 그에게 필생의 업이 된 것이다.

그의 학문 탐구는 함양에서 선산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계속된다. 스승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자리를 옮기면서다. 이때 선산향교에는 여러 인물이 모였는데 이승언(李承彦), 원개(元개), 이철균(李鐵鈞), 곽승화(郭承華), 주윤창(周允昌) 등도 포함됐다. 김굉필의 소학에 대한 열정은 갈수록 깊이가 더해졌다.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칭하며, 30세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하고, 육경(六經)을 섭렵했다고 한다.

◆스승과 절연 그리고 무오사화

김굉필은 성종 11년(1480)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한다. 이때 그는 척불(斥佛)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一身)의 청정적멸(淸淨寂滅)만을 위하는 것이라는 게 상소의 요지였다. 유학에 대한 그의 가치관이 뚜렷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이처럼 강직한 김굉필은 뜻이 다름을 이유로 스승과도 척을 지게 된다. 김종직이 나랏일을 맡게 되자 그의 처신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 것. 당시 김굉필과 김종직은 여려 편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입장을 표출한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 맥 이어
김종직 문하서 공부하며 소학 심취
유배지서 개혁가 조광조 가르치기도
갑자사화때 賜死…중종반정 후 신원


둘의 사이가 급속히 틀어진 것은 성종 17년(1486)의 일이다. 이조참판으로 있던 김종직에게 김굉필은 시를 지어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종직도 함부로 폄훼하지 말라는 답시를 보낸다. 이후 이들의 교류는 사실상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굉필의 벗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사우명행록에 이들의 시를 옮기고는 '이 두 사람의 사제지간이 마침내 갈렸다'고 적었다.

스승과 다른 길을 가게 된 김굉필도 벼슬길에 나선다. 성종 25년(1494),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다.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의 천거로 종9품 남부참봉에 제수된다. 이어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에는 군자감 주부에 제수됐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정6품)에 오른다. 출세가도는 조정 막료들이 그의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굉필의 관직생활은 길지 않았다. 무오사화(연산군 4년·1498년)가 일어나며 한순간에 역적으로 몰린다. 그는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된다. 2년 뒤에는 또 한 번 순천으로 이배됐다. 조선 전기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대립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조광조와 인연, 문묘 종사로 이어져

김굉필은 유배지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학문 연구에 증진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의 인격과 학문을 흠모해 가르침을 청하는 선비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고 한다. 특히 희천에서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했다. 김굉필의 학통을 이은 조광조는 개혁정치를 펼치며, 조선이 유교의 나라로 굳혀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김굉필이 조선 유학의 시조로 평가받을 수 있게 한 기반이기도 했다.

무오사화로 시작된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갑자사화(1504년)가 일어나 김굉필은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진다. 평생 강학(講學)에 몰두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뤄면서 김굉필은 도승지에 추증된다. 이후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돼 그의 존재는 더욱 부각됐다. 중종 12년(1517)에는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가 컸다. 1591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이 숙청됐으나 김굉필은 성균관 유생들의 힘을 업고 증직(贈職)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선조 8년(1575)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해군 2년(1610)에는 정여창·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문헌=실천하는 도학자 김굉필, 이경우, 민속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문=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공동기획: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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