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피플] 대구 출신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혜선

  • 김수영,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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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08 08:26  |  수정 2021-06-27 14:26  |  발행일 2020-08-08 제22면
"한국에선 자극적 기교에 치중…음악은 등수 매기는 기술이 아니다"

백혜선피아니스트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공연을 펼친 피아니스트 백혜선은 "음악으로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피아니스트 백혜선(55). 그녀에게 영광은 빨리 찾아왔다. 199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국 국적 음악인으론 처음 입상했다. 1위 없는 3위였다. 74년 정명훈이 미국 국적으로 이 대회 2위를 차지한 바 있다. 전국 신문에서 백혜선 입상은 대서특필됐다. 곧이어 서울대에서 교수 제의가 들어왔다. 29세에 서울대 최연소 교수가 됐다. 금세 한국음악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2005년 돌연 서울대를 나와 미국으로 떠났다. 많은 이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현재 그는 클리블랜드 음악원과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연주자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10년 전부터 대구가톨릭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고향인 대구와의 인연도 놓지 않고 있다. 대구 중구 종로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한국의집'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 떠난건 나를 찾는 도전
서울대 교수라는 간판에 묶여
우물안 개구리 될까 위기 느껴
연주에 몰입하기 위해 미국행
명예와 실력 중 실력 택한 것
음악은 감정·경험·지식도 중요
다양한 분야의 공부 병행해야


▶양친이 모두 의사다. 어떻게 피아니스트가 됐나.

"부모님이 바빠서 어린 시절 제 교육은 외할머니가 맡았다. 외할머니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다. 어릴 때부터 수영·음악·미술 등을 배우도록 했다. 그 와중에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4세 때 처음 콩쿠르에 나갔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피아노를 쳤다. 스승은 추승옥 전 영남대 음대 교수였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던 선생님이 집에 같이 살면서 피아노를 가르쳤다. 바쁘고 엄격했던 부모님 아래 있다가 상냥한 선생님을 만나니 마냥 좋았다. 선생님처럼 서울대 음대에 가는 게 꿈이었다."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오랫동안 외지에서 생활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백준기 전 계명대 동산의료원장)가 중구 종로에서 종로의원을 운영했다. 집과 의원이 붙어있어 그 동네에 살았다. 피아노 선생님이 서울 예원학교에 시험을 권유해 응시했는데 합격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갔다. 예원학교 2년 때였다. 유학을 떠나는 추 선생님과 같이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변화경 선생님과 그의 남편인 러셀 셔먼 교수를 만났다. 10년간의 서울대 재직기간 외에는 거의 외국에서 생활했다. 그래도 고향을 잊지 않고 있다. 1년에 서너 번은 대구에 온다. 초등학교 때 대구시민운동장 수영장에서 연습하던 생각도 많이 난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서 "백혜선에 대해 최고의 기교보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섬세하고 사색하는 연주자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피아니스트에게 있어 기교는 중요하다. 백혜선을 평할 때 호쾌한 타건, 화려한 기교 등을 언급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인은 기교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기교를 기본으로 감정, 경험, 지식 등이 더해져야 한다. 그래서 음악 외에 다른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

▶철학을 전공한 스승의 가르침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는데.

"러셀 셔먼 교수에게 피아노를 배울 때 에세이 쓰기를 많이 했다. 교수님이 과학·미술·문학 잡지 등을 꾸준히 읽고 에세이를 쓰도록 가르쳤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얻게 됐다."

백혜선

▶한국에서도 이런 방식의 음악교육을 하는가.

"한국에서는 음악이 스포츠화되는 것 같다. 등수를 매기고 좋은 등수를 받아야 인정받는다. 음악은 감상자의 취향에 따라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양하다. 어떤 이는 연주자의 따스함, 어떤 이는 아카데믹한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를 일률적으로 등수화해 서열을 매기는 것은 바르지 않다. 음악은 기술이 아니다. 한국 음악계가 기교에 치중하고 자극적인 것을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의식 때문이다."

▶선망의 대상인 서울대 교수직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서울대 교수로 갈 때부터 고민이 많았다. 교수가 되면 연주하는 데 몰입하기 힘들다.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에서 권해 뿌리치질 못했다. 역시 기우가 아니었다. 연주자로 활동하기도, 교수사회에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실력보다 서울대 문패라는 것이 중요한 한국 사회가 이해되질 않았다. 문득 이러다가 서울대라는 간판에 묶여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왔다. 애가 둘이나 되니 육아도 만만치 않았다. 교수, 엄마, 연주자를 다 잘할 자신이 없었다. 교수를 포기했다. 다시 도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머무르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삶이었다.

"서울대를 떠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울대를 버려야 그다음 진전이 있을 것 같았다. 서울대에 있으면서 교수나 학생 모두 서울대가 종착역이 된 경우를 많이 봤다. 서울대는 더 나은 발전을 위한 시작이어야 한다. 미국으로 다시 떠난 것은 명예와 실력 중 실력을 택한 것이다. 그때가 마흔이었다. 딱 10년간 미국에 있으면서 도전해 보자 결심했다. 연주자로서, 부모로서 나름 성공했다."

미국으로 이주한 후 미국, 캐나다, 중국 등에서 꾸준히 독주회·협연을 통해 피아니스트로서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2017년에는 첼로의 거장 로렌스 레서와 미국 주요 도시 투어를 했다. 백씨의 큰아이는 올해 하버드대에 입학했다.

자랑스러운 나의 고향 대구
코로나 폭증 들었을땐 좌불안석
방역모범도시 소식엔 가슴 벅차
지난달 대구 독주회도 큰 감격
지친 시민 위해 정성 다해 연주
10년째 대구가톨릭대 석좌교수
매년 5월과 11월 지역찾아 활동


▶코로나 때문에 고향이 자랑스러워졌다고 했는데.

"지난 2월 대구에서 확진자가 폭증하는 것을 보고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좌불안석이었다. 어릴 적 추억이 깃들어있는 고향이 무너져 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걱정은 잠시였다.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미국이 코로나 때문에 난리가 났고 대구는 코로나 모범도시가 됐다. 멀리 있지만 가슴 벅찼다. 한국은 마음만 먹으면 못하는 게 없다. 세계 음악계에서도 한국 연주자의 활약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런 역량을 코로나에서도 보여줬다. 고향이 대구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지난 7월 초 대구콘서트하우스 무대에 섰다.

"대구가톨릭대 석좌교수라서 매년 5월과 11월 대구에 온다. 코로나인데도 대면레슨 요청이 왔다. 반가웠다. 미국은 아직도 대부분 대학이 온라인강의를 한다. 한국에 지난 5월 들어와 자가격리하고 있을 때 콘서트하우스에서 재오픈음악회 연주를 부탁했다. 흔쾌히 수락했다. 지역 젊은 음악인들과의 합동공연에 이어 독주회를 했다. 코로나로 400명의 관객들과 만났지만 수천 명과 함께하는 것처럼 감격이 컸다. 코로나로 힘들었던 고향 사람들에게 내 정성을 다한 곡을 보여줬다."

▶대구가톨릭대 석좌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석좌교수라는 자리가 대구와의 인연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기 때문에 소중하다. 이게 없었다면 마음만 있지 고향에 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매년 우수 학생 1~2명을 클리블랜드음악원에 편입시키고 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할 좋은 기회다. 졸업하면 대구가톨릭대와 클리블랜드음악원에서 모두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이번 한국 방문이 가진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한국에서 두 달 정도 있었다. 그동안 애들이 어려서 한국에 오랜 시간 머물 기회가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오로지 피아노 연습하고 사색하면서 오랜만에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의 백혜선이 갈 길도 고민했다. 그동안 살아온 삶에 감사하다. 가진 것에 비해 많은 것을 받았다. 감사한 삶을 사회에 환원하는 게 앞으로의 중요한 일이다. 음악으로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논설위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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