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경상도 재지문중과 만인소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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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23   |  발행일 2020-10-23 제35면   |  수정 2020-10-23
사도세자 恨 풀고자 모인 경상도 유생…정조는 이 疏를 보고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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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만인의 청원, 만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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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20년(1694)은 영남 남인이 마지막으로 피 흘린 해였다. '갑술환국'이라 일컫는 그해 이후 100년 동안 영남인은 미천한 시골선비로 취급받으며 당상관 보임은 하늘의 별따기였고 어쩌다 대과급제를 해도 5품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30년 뒤 무신년(1728년) 난에는 반역향으로 낙인찍혀 경상도 양반가문 대부분은 중앙 진출의 꿈을 버리고 농토에 기반을 둔 '재지(在地)' 사족이 되어 향촌을 이끌었다. 정조가 등극하고 10년이 지난 뒤 채제공(1720~1799, 조선 후기의 문신, 영조 후반 시대와 정조 시대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 한 사람이며, 정약용·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 우의정이 되어 국정을 이끌자 정조는 영남인을 달래고 우군세력으로 키우기 위해 경주 숭덕전(박혁거세 사제 전각)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에서 치제를 지내고 도산서원에서 별시(특별과거)를 열었다.

조선 후기 100년간 시골선비 취급
정조 최측근 채제공 우의정 되자
다시 조정에 불러준 성은에 보답
영남 유생들 1만명 동참해 疏 올려
현종 1천명 상소 보다 10배나 많아

참여는 개개인 아닌 문중별로 진행
경상도 고을 53곳·225개 문중 참여
대구서는 4개 문중이 만인소에 동참
길이 96.5m·폭 1.1m 한지 두루마리
한장에 80명씩 수결 찍어 130여장

2010년 10월 '안동만인소'로 재현
이명박 대통령에 靑 춘추관서 전달
마지막 만인소 후 130년 만에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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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는 참여유생 수결(서명)이 뚜렷한 만인소 명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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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만인소 봉소의식이 2010년 10월 2일 열렸다. 경북도 평생학습축제에서 기관·단체장과 시민 등이 서명한 너비 1.11m, 길이 100m 크기의 만인소.

◆만인소로 영남유림은 결집하고

다시 조정의 문을 열어준 성은에 보답하고자 1792년 정조 16년에 경상도 유생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1만명이 넘은 인원이 동참해 소를 올리는데 이를 '영남만인소'라 한다. 이전까지 가장 많은 인원의 소는 현종 7년(1666) 유세철이 올린 송시열 예론 반대소로 1천여 명이었다. 교통과 통신수단이 열악한 조선 후기에 1천명 인원도 대단한데 하물며 1만명 유생의 소는 역사상 전무한 사건으로 소외 지역의 집단적 분노였고 조선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경상도는 신라의 옛터로 국가의 근본이라 했고 경상도만큼 토양이 비옥하고 인재가 풍부한 곳은 없다고 했다. 실제로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 압도적 수의 과거 합격자는 경상도에서 배출되었고 조선 중기까지 문묘에 배향된 아홉 현인 중 여덟이 이곳 출신이었다. 조선팔도에서 유생이 가장 많은 고을도 경상도였다.

정조의 노론 견제 흐름에 편성한 성균관 남인 유생들이 봉화 삼계서원으로 통문을 보냄으로써 만인소는 시작되었다. 유림대회에서 이상정의 조카, 한산이씨 이우가 소두(疏頭·소의 대표)가 되어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사도세자 한을 풀고자 하는 만인소를 올리게 되는데 정조를 통곡하게 만들었던 이 만인소는 영남유림 200여 문중과 1만여 명의 경상도 유생을 결집시켰다.

◆경상도 225개 문중이 참여하다

만인소 참여는 개개인이 아니라 문중별로 진행되었고 참여 인원 1만57명의 이름과 신분이 승정원일기에 수록돼 있다. 조선은 씨족사회이고 향촌을 지배한 것은 조정이 아니라 문중이었다. 고을마다 향촌을 이끄는 유력문중과 수선(帥先)서원이 있었다. 만인소는 경상도 71개 고을 중 53개 고을에서 내로라하는 양반가문 225개 문중이 참여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경북 153개, 경남 72개 문중이었다. 고을별로 평균 3~4개 문중이 참여했고 유림세력이 강한 지역은 문중 수가 많았다. 고을 내 세거지를 달리하여 거주하더라도 같은 집안이면 한 문중으로 참여했다.

고(故) 이수근 교수의 책 '영남학파 형성과 전개'에 따르면 안동(예안 포함)이 20개 문중으로 가장 많고 상주가 16개, 영주가 11개, 성주와 선산이 9개, 영천과 예천이 7개 문중이 참여했다. 바닷가와 내륙벽지 고을인 흥해, 청하, 자인, 비안, 의흥현은 참여 문중이 없었다. 문중별 참여 인원 수는 40~50명에서 200여 명까지 문중세와 유생 수에 따라 달리했다.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문중은 안동의 무실류씨(전주류씨) 집안으로 200여 명이다. 천전 의성김씨와 하회 풍산류씨 문중이 100여 명, 퇴계 진성이씨 문중이 64명, 상주 풍양조씨 문중이 91명, 경주 여강이씨 이언적 문중이 43명, 경주손씨 문중이 24명 등으로 오늘날 시각으로 보아도 대단한 규모다.

경상도 사족은 신라 귀족과 여말 삼은(목은·포은·야은) 후손, 사림의 동국 5현, 퇴계·남명 제자가 주류였고 조선 초부터 한양관리가 처가거주혼이나 사화를 피해 낙남(落南)했다. 일직 한산이씨, 무실 전주류씨, 상주 풍양조씨, 경주 여강이씨는 입향조가 경상도 명문가로 장가 들어 처가고을에 세거했고, 영양 한양조씨, 임청각 고성이씨, 칠곡 광주이씨는 사화때 낙남해 명문집안이 되었다. 경상도는 살기가 좋아 토박이 토성이든 넘어온 내성이든 쉽게 뿌리를 내렸고 크게 번창했다.

두 번의 대기근에 공명첩을 사서 신분 상승을 꾀한 평민 중에서 누대에 걸쳐 소학과 가례를 익혀 양반층에 진입한 몇몇 신향도 만인소에 동참했다. 128개 문중이 참여한 현종조 예송유소에 비해 참여 문중 수가 100개 증가했다.

◆대구 재지문중도 만인소에 참여하다

대구부는 4개 문중이 만인소에 참여했다. 하빈의 달성서씨 서사원 집안, 동구 옻골(칠계)의 경주최씨 최흥원 집안, 서재의 성주도씨 도성유 집안, 동구 미대동의 인천채씨 채응린 집안이다. 서사원은 정구의 수제자, 최흥원은 이상정과 교유했으며, 도성유는 서사원의 제자이고, 채응린은 퇴계 제자였다. 모두 임란 의병장 집안으로 읍성과 적당히 떨어진 곳에 세거지를 열어 대구를 대표했다.

임란 직후 1601년 경상도 감영이 대구로 옮겨오자 대구는 경상도 행정과 상업의 중심이 되었고 관찰사는 노론관리였다. 미관말직도 어려운 대구의 재지사족에게 노론 관찰사 영향력은 매우 커서 다른 지역보다 노론화 진행이 활발했다. 이 시기 월촌의 단양우씨 집안과 만촌의 옥천전씨 집안은 이미 노론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화원의 남평문씨 집안은 아직 세거하기 전이었다. 대구의 수선서원은 동화천 변의 연경서원이다. 퇴계를 배향하고 1660년 사액서원이 된 이곳에서 안동 유림의 통문을 받고 대구 유림은 참여 여부를 결정했다.

◆만인소는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길이 96.5m 폭 1.11m의 한지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 만인소에는 한지 한 장에 80명 유생의 수결이 찍혀 있으며 130여 장으로 이어져 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윤사월 꽃피는 봄날에 짚신을 갈아 신으며 풍산들, 해평들, 안강들을 누비고 다니게 했는가?

인조반정 후 여섯 임금 치세 동안 잊힌 백성으로 성은에 보답할 길이 막혀 버렸고 수많은 집안이 이름뿐인 사족이었다.

만인소 참여는 훌륭한 조상에 대한 찬란한 기억을 일깨워주었고 조정 출사의 꿈은 버렸지만 나라부름에 함께한다는 영남유가의 마지막 자긍심이었다. 문중을 대표한 수백명 선비가 자색 소함을 받들고 한양 오백리 길을 흰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나라의 의리를 밝히려는 봉송행렬은 가히 장관이었다. 자칫 꺼질 뻔했던 선비 불씨를 지켜주어 경상도 고을고을마다 고색창연한 종가·종택과 묵직한 현판이 살아남아야 할 이유였다. 도가 동쪽으로 온 까닭이었다.

이후 나라가 어려울 적마다 만인소로 뜻을 밝혔고 개화기 위정척사 만인소는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왕조가 그들을 버렸을지언정 그들은 빼앗긴 나라를 찾는데 목숨을 바쳤다. 영남 재지문중이 배출한 우국지사는 1천명이 넘었다.

◆ 10년 전 재현된 봉소의례

만인소는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 이후 2·28과 5·18 민주운동 등에 영향을 주었던 건 아닐까. 이 역사적인 만인소는 '안동 만인소'로 재현돼 2010년 10월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됐다. 이날 전달된 만인소는 1881년 안동·상주 등 영남의 유생들이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내세우면서 개화정책을 비판하고 그 추진자들을 규탄했던 마지막 만인소 이후 중단된 지 꼭 130년 만에 부활된 것이다. 이날 만인소 청와대 '봉소의례'에는 권영세 안동시장과 김광림 국회의원을 비롯해 소두 역할을 맡은 이재춘(안동차전놀이 기능보유자) 안동문화원장, 만인소장을 쓴 서예가 박문환씨 등 지역 유림 10여 명의 참석자들이 모두 전통 의례복을 입는다. 봉소의례는 1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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