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TV

더보기

[신간] 불태워라...속앓이 말고 버럭하세요

  • 노진실
  • |
  • 입력 2020-10-30   |  발행일 2020-10-30 제13면   |  수정 2020-10-30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화 내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대부분 남 시선 두려워 표현 못해
부당함 앞에선 표출할 줄 알아야

2020102901000921400036822

대구의 8년차 직장인 A. 그는 업무에 있어서는 '못 하는 일이 없다'는 평을 듣지만, 못 하는 일이 딱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화를 내지 못한다는 것. A는 스스로도 '분노 표출 불능'이라고 말한다.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목격해도 A는 화를 내지 않는다. 성숙하고 온화한 여직원, A가 유지하고 싶은 수식어다.

왜일까. 괜히 남들의 구설수에 오르기 싫기 때문이다. '이상한 여자'라고 평가받고 괜한 루머의 주인공이 될까 두렵다.

"루머를 만들며 타인의 평판에 흠을 내며 살아가는 패거리, 괜히 입바른 소리를 하고 화를 냈다가는 그런 패거리에게 '그래서 여자는 안돼'라는 뒷담화를 들을 수 있어요. 저는 곧 결혼도 해야 하는데, 제가 일하는 이 좁은 바닥에서 '화 많고 별난 여자'로 찍혀봤자 좋을 게 있겠어요" 대구의 직장인 A는 오늘도 화내지 않는다.

신간 '불 태워라'는 미국의 칼럼니스트 릴리 댄시거가 엮은 책이다.

레슬리 제이미슨, 리사 마리 베실, 리마 자만, 섀힌 파샤, 키아 브라운 등의 이름을 가진 22명의 작가가 쓴 글을 한 책에 묶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불태우라는 말일까.

책의 부제가 불태울 대상을 설명해준다. 부제는 바로 '성난 여성들, 분노를 쓰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성난 여성들이 글로 분노를 불태우고, 또 불태우자고 하는 책이다.

'분노'는 인간의 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부조리를 목격했을 때, 비겁하고 비열한 사람 앞에서 인간은 분노의 감정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분노라는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책은 시작한다.

서문의 첫 문장이 흥미롭다.

"아주 오래전부터 분노한 여성들은 하피(포악한 여성을 비하해 일컫는 영어단어), 암캐, 마녀라고 불렸다. 그들에게는 신경질적이다, 미쳤다, 위험하다, 억하심정이 있다, 질투한다, 비이성적이다, 호들갑을 떤다, 앙심을 품었다, 호르몬에 휘둘린다 등의 딱지가 붙었다."(7쪽)

이민자, 뚱뚱한 흑인, 장애인, 어머니, 약물 중독자, 만성 질환자 등 각자가 처한 상황과 인종, 젠더, 성적 지향, 나이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작가들은 '분노로 가득 찬 허파' '우리가 화날 때 우는 이유' '트랜스 여성의 분노에 대하여' '물려받은 분노' '미뤄둔 분노' '내 이름과 내 목소리' '분노의 가마로부터' 등의 제목으로 자신들의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했고, 얼마나 통제됐으며, 앞으로 어떻게 분노를 표출하고 활용할 수 있을지 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사회가 여성을 분노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길들여왔는지를 작가들의 글을 통해 보여준다.

작가들은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정당한 분노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온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여성의 분노라는 현상은 종종 외면되어 왔고, 분노한 여성의 모습은 위협으로 재구성되곤 했다. 위해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 위해를 가하려 마음먹은 사람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렇게 위협적인 여성 원형들의 계보가 만들어졌다. 기다란 발톱이 달린 하르퓌아이, 마법을 부리는 마녀, 머리카락이 몸부림치는 뱀으로 되어 있는 메두사.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여성의 분노가 부자연스럽거나 파괴적인 것이라고 배운다."(15쪽)

"캘리포니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 앤 M. 크링이 발표한 '성별과 분노에 관한 연구분석'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이 '분노 표출 사례'를 보고하는 빈도는 비슷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수치심과 당혹감을 경험한 사례는 여성의 경우에 더 많았다. 여성이 분노를 표현할 때는 '독살스러운' '적대적인' 같은 수식어가 붙지만, 남성의 분노에는 '강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향이 있다."(16쪽)

또한 책 속 한 저자는 세상의 '편가르기'와 '구분짓기'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고 말한다.

2020102901000921400036821
릴리 댄시거 엮음/ 송섬별 옮김/ 돌베개/ 316쪽/ 1만5천원

"저 큰 광고판 보이지. 종교단체에서 걸어 놓은 대형 광고판을 지나치면서 내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세상에는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단다. 이렇게 두려움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누구와 친구가 돼야 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정해주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아. 우린 그런 사람들이 아니니까."(232쪽)

'불 태워라'는 여성의 분노를 말하기 위해 쓰인 책이지만, 책이 변호하고자 하는 범위를 '여성'에서 '인간'으로 확대해도 좋을 듯하다.

비단 여성이 아니라도 '분노할 권리'조차 잃고 사는 이들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경제적 계급이나 배경 등으로 인해 분노의 권리가 통제되기도 한다. '갑'과 '을'의 관계와 지위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태어났든, 어떤 삶을 살고 있든, 얼마나 배우고 가졌든, 누구라도 부정과 부조리 앞에서 뜨겁게 분노할 수 있어야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분노에 대해서도 더 이상 쓸데없는 편견을 가져선 안 된다.

"스물두 명의 작가들이 내가 그들에게 했던 말, '괜찮아요, 분노하세요'라는 말을 당신에게 건네고 있다. 당신도 우리와 함께 분노했으면 한다. 다 함께 침묵을 깨뜨리면 우리는 불처럼 더 크고 넓게 번져 모든 것을 태워 없앨 수 있으리라."(12쪽)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우호성의 사주 사랑(舍廊)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