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2] 석문 정영방, 조선 3대 민가 정원…돌·꽃·풀, 모든 물상에 성리학 정신 깃들어

  • 류혜숙 작가
  • |
  • 입력 2021-07-13   |  발행일 2021-07-13 제12면   |  수정 2021-08-2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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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방이 조성한 서석지. 연못 뒤쪽은 정자인 경정으로 손님을 맞고 제자를 가르치던 공간으로 서석지의 중심 건물이다. 수직사, 주일재, 경정, 서석지로 이뤄진 정영방의 별서정원은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정원으로 꼽힌다.

마을 입구에 선바위(立岩)가 솟아 있다. 맞은편에는 거대한 석벽이 치솟았는데,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끝 비단처럼 아름다운 벼랑이라 '자금병(紫錦屛)'이라 불린다. 선바위와 자금병이 마주하여 문을 이루니 석문(石門)이다. 그 아래로 반변천과 청기천(靑杞川) 두 물줄기가 만난다. 남이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는 남이포다. 청기천을 거슬러 석문이 열어 놓은 세상으로 들어간다. 강이 산을 에워싸고 풀과 나무와 꽃이 무성하다. 맑은 못과 푸른색 절벽은 밝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영양 입암의 연당리(蓮塘里)다. 본래 이름은 생부동(生部洞)이었다. 마을과 뒷산에 흰 돌이 많아 '돌배기'라고도 했다. 마을 이름이 연당리가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 이곳으로 들어와 은거한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때부터다.

광해군 때 등거리 외교정책에 불만
진사시 합격했지만 벼슬 나가지 않아
병자호란 후 연당리로 들어와 은거
'서석지'로 불리는 별서정원 만들어
연못 모든것에 이름 붙이고 詩로 남겨


#1.석문 정영방

정영방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본관은 동래(東萊)다.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대를 이어온 명문가였다.

정영방의 선조는 고려의 문신인 정목(鄭穆)으로, 시로 이름이 높았고 예부시랑을 거친 문단의 거목이었다. 고조인 정환(鄭渙) 또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연산군의 혼정을 직간하다 갑자사화에 휘말려 유배지 상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이 즉위해 그의 죽음을 모른 채 벼슬을 내렸는데 이후 후손들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꺼리게 된다. 증조는 성균관 생원인 정윤기(鄭允奇), 조부는 성균관 진사인 정원충(鄭元忠)이다. 아버지는 정식(鄭湜)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정영방은 1577년 지금의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憂忘里)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집안의 기대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정영방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열네 살 때인 1590년에 아버지의 사촌 형제였던 정조의 양자가 되어 안동에서 생활했다. 친형제 간 우애가 남달랐던 그는 이를 계기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16세였다. 한창 학문에 매진해야 하는 시기에 난을 겪은 것이다. 게다가 형수와 누나가 왜적에게 쫓기다 화를 면하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전쟁의 실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쟁이 끝나고 정영방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제자가 되었다. 우복은 그의 뛰어난 재주와 문학적 재능에 대해 "정영방과 나눈 하룻밤 대화가 자기의 3년 공부보다 낫다"라고 극찬했다. 정영방은 선조 38년인 1605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후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존명배청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혼탁했다.

정영방은 광해군이 후금과 명나라를 두고 등거리 외교정책을 펼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혼란한 조선의 정계 속에서 자신의 고집스러운 성격이 수용되지 못하리라고 판단했고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공부하리라 마음 먹었다. 결국 그는 영양 연당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1610년부터 초당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와 어린아이들 때문에 완전한 이주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40세가 되던 161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정영방은 슬픔으로 병을 얻어 몇 번이나 기절하면서도 부축을 받으며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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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방은 서석지 북쪽에 네모난 단을 내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했다. 사우단 뒤로 서재인 주일재가 보인다.

#2.영양에 은거하다

정영방은 연당리 초당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정원 조성 계획을 세웠다. 계획만 10년, 그는 1620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원 공사를 시작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스승 우복 정경세가 이조판서에 재직할 때 천거를 위해 정영방에게 의사를 물었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1627년 후금이 침입해 왔다. 정묘호란이다.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배금(排金) 여론은 격증했다. 조선의 태도를 알게 된 후금은 재침입을 결심한다.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다. 그리고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이 요구한 것 중 하나가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특히 명나라와의 단절은 온 나라 선비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스스로를 '숭정처사'라 자처했다. 정영방도 그들 중 하나였다.

정영방은 예천의 가산을 맏아들 정혼에게 맡기고 식구들과 함께 연당리로 완전히 들어왔다. 그리고 주거공간인 수직사(守直舍), 서재인 주일재(主一齋), 정자인 경정(敬亭), 그리고 연못인 서석지(瑞石池)로 이루어진 자신의 별서정원을 완성했다. 그는 석문을 외원이라 하고 자신의 정원을 내원이라 했다. 그리고 석문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논어의 헌문(憲問)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자로가 석문 밖에서 잤다. 다음날 문지기가 물었다. 어디서 오시오? 자로가 말했다. 공씨(孔氏)댁이요. 문지기가 말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하려는 그 사람 말인가요?' 공씨란 공자를 뜻한다.

실현하기 힘들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이상적 정치와 문화와 사회관계를 제시하고 추구했던 공자. 정영방은 이 이야기를 의식하면서 호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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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당리 고샅길에 들어서면 서석지의 담장 너머로 400년 이상 된 은행나무와 맞닥뜨린다. 정영방의 부인이 작은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3.경(敬)의 세계 서석지

통칭 서석지로 불리는 정영방의 내원은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정원으로 꼽힌다. 연당리 고샅길에 들어서면 서석지의 담장 너머로 솟아오른 엄청난 은행나무와 맞닥뜨린다. 400년 넘게 이곳에 서 있는 나무는 정영방의 부인이 작은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사주문에 들어서면 거의 마당 전체가 연못이다. 북쪽에는 단을 내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했다. 동북 모서리에는 물을 끌어들이는 '읍청거'를, 서남 모서리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토예거'를 냈다. 연못 안에는 연못을 조성할 때 나온 크고 작은 돌들을 자연스럽게 두었다. 상서로운 돌, 서석(瑞石)이다. 서석지 이름은 이 돌들에서 왔다. 정영방은 서석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서석지의 돌은 속에는 무늬가 있고 밖은 흰데, 인적이 드문 곳에 감춰져 있다. (중략) 마치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군자와 같고 덕과 의를 쌓으며 저절로 귀함과 실속이 있으니 가히 상서롭다 일컫지 않겠는가.'

원림은 반드시 건축물을 향하고 건축물은 그 원림을 끌어들이며 그가 추구하는 도를 상징하는 형태로 지어진다. 연못을 중심으로 서쪽에 경정, 북쪽에 주일재가 배치되어 있다.

정자인 경정은 손님을 맞고 제자를 가르치던 공간으로 서석지의 중심 건물이다. 경정의 경(敬)은 유학자들에게 있어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곧 경이다. 퇴계는 경을 도의 관문이고 덕의 기본이라 했다.

주일재는 서재다. '주일'이란 '한 가지 뜻을 받든다'는 뜻으로 경을 실천하는 장소가 된다. 경정 마루에 앉으면 낮은 담 너머로 멀리 1㎞ 넘게 세상이 보였다고 한다. 정영방은 성리학자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꽃과 풀, 모든 물상이 성리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원림을 이루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부여하고 '경정잡영(敬亭雜詠)' 32수를 시로 남겼다.

'일이 있으면 도움을 바라지 말고 / 깊은 못에 임한 듯 더욱 조심하라 / 늘 깨어있는 자세로 세상을 관조하며 / 서암승 같이 하지 않고 애쓰리라.' (경정. 한시 해석은 신두환 안동대 교수의 '석문 정영방 선생의 원림과 문학' 참조)

사방 온 벽에는 책들이 가득했다. 정영방은 날마다 단정히 앉아 주자와 퇴계를 읽었다. 그리고 인근에 사는 이시명(李時明), 조전(趙佺), 조임(趙任), 신즙(申楫) 등과 교유하며 시를 짓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깊고도 넓은 그윽한 골짜기에 / 바르게 앉아서 성정을 다스리니 / 해는 기울어 뜰의 반은 그늘이 들고 / 골짜기 새들과 마주하여 시를 읊노라.'(유간, 그윽한 골짜기)

그의 시는 당대에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던 남극관(南克寬)은 정영방의 시를 가리켜 "체기(體氣)가 높고도 오묘하며 사람을 흥기시킴이 심원하다"고 했고, 권상일(權相一)은 "담박하여 옛 당나라 사람들 시의 품격을 얻었다"고 칭송했다.

바람이 순하고 볕이 따뜻하면 지팡이를 짚고 산천을 거닐었다. 바위와 소나무 아래를 배회하고 주위의 자연을 향유하며 그 경치를 시로 노래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신선이라 했다.

1650년 봄, 기력이 쇠해진 정영방은 선영이 있는 안동으로 돌아갔다. 6월에는 감기에 걸렸다. 그리고 7월7일 아들에게 부탁해 머리를 감고 손톱을 깎은 뒤 편안히 운명했다. 74세였다.

그의 문집에는 주옥같은 시편이 470여 편이나 실려 있다. 정영방의 문학은 영조 때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편찬하기 위한 사료로 수집돼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그가 류덕무(柳德茂)에게 보낸 글이 있다.

'텅 빈 골짜기 그윽한 난초여 / 구름 사이로 미인을 바라봄이여 / 해는 함지에 떨어지려 하니 / 푸른 계수나무가 시들고 아름다운 꽃이 마르네 / 시절은 다시 좋아지기 어렵도다 / 밝도다 멀리 떠날 수 없음이여.'

백이숙제의 고사를 변용해 암울한 시대를 표현한 것이지만, 현대의 청자에게 이 글은 이제 가고 없는 고집쟁이 시인에 대한 그리운 서정을 느끼게 한다. 이제 7월, 연꽃 피는 시절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신두환, 석문 정영방의 원림과 문학, 한문고전연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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