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9] 서애·우복 학통 이은 도남서원, 조선 유학 전통계승 자부심…낙동강 소금배도 지날때 돛 내려

  • 류혜숙 작가·박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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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8-09   |  발행일 2021-08-09 제11면   |  수정 2021-08-09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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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 중 한 곳인 상주 도남서원. 조선시대 당시 낙동강에서 안동으로 올라가는 소금배도 서원 앞을 지날 때는 돛을 내려야 했을 만큼 위상이 남달랐다. 도남서원 경내 건물들의 반듯한 지붕선 너머로 낙동강이 크고 넓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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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년 창건한 도남서원. 원호를 도남이라 한 것은 '조선 유학의 전통이 바로 영남에 있고 상주가 이를 계승했음'을 천명한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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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남서원 경내는 매우 넓고 반듯하며 건물들은 야트막한 산의 지세에 맞춰 조금씩 단을 높여 자리하고 있다. 누각인 정허루(靜虛樓)가 당당하다.

웅장하고 고요하다. 걸음이 저절로 단정해진다. 그러나 공기는 날듯이 가볍고 마음은 자유롭다. 이런 느낌이 선현들이 말한 호연지기 인가. 계단을 오르고 나면 자꾸만 뒤돌아본다. 지나온 건물들의 반듯한 지붕선 너머로 낙동강이 크다. 강 가운데에 앉아 물살을 어르는 경천섬 너머로 비봉산이 힘차게 솟구친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경천대(擎天臺)가 장대하고, 물길을 따라 흐르면 관수루(觀水樓)가 우뚝하다. 이 모든 경승 가운데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자리한다. 조선시대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 중 한 곳이다.

#1. 도남서원

임진왜란 후인 1605년, 상주 유림에서는 서원 건립을 의결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자리를 정하고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의 위패를 모셨다. '도남(道南)'이란, 북송의 정자가 제자 양시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道)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원호를 도남이라 한 것은 조선 유학의 전통이 바로 영남에 있고 상주가 이를 계승했음을 천명한 것이다. 창건 당시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의 자문을 받아 서원의 위치와 이름을 정했다고 전한다. 광해군 8년인 1616년에는 노수신(盧守愼)과 류성룡을, 인조 13년인 1635에는 정경세(鄭經世)를 추가 배향했다. 숙종 2년인 1676년에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에 일익을 담당하던 도남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초석만이 남아 있었다. 이후 1992년 유림에서 일부 복원했고 2002년부터 상주시 유교문화관광개발 사업으로 옛 모습을 찾았다.

솟을삼문은 입덕문(入德門)이다. 향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닫혀 있다. 좌측 고직사 옆에 있는 작은 협문인 영귀문(詠歸門)으로 들어간다. 경내가 매우 넓고 반듯하다. 각 건물들은 야트막한 산의 지세에 맞춰 조금씩 단을 높여 자리하고 있다. 누각인 정허루(靜虛樓)가 당당하다. 정허루 옆 'ㄱ'자 모양의 건물에는 '사행당(四行堂)'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이 건물이 가장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정허루 뒤로 두 단 높은 자리에 강당이 정좌해 있다. 팔작지붕은 날아갈 듯하고 겹처마와 창호의 세살이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임란후 1605년 상주 유림 건립 결의
정몽주·이황·류성룡·정경세 등 배향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2002년 복원

고려때 시작된 '낙강시회' 전통 계승
1622년 이준의 낙강범월시회 대표적
지금도 해마다 '낙강시제' 열어 명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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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인 손학재(위쪽)와 서재인 민구재.

'도남서원' 현판 글씨는 어느 마음 곧은 이가 정직하게 쓴 듯 맑다. 강당 앞에는 동재인 손학재(遜學齋)와 서재인 민구재(敏求齋)가 마주 보고 있다. 서재 옆에 있는 1칸의 작은 건물은 장판각이다. 강당 뒤 높은 돌계단 위에 내삼문이 있다. 사당인 도정사(道正祠)가 있는 신성한 공간이다. 사당 옆에는 영역을 구분하여 전사청을 두었다.

조선시대 서원의 핵심 기능은 교육과 제향이다. 조선에 서원 제도를 보급, 정착시킨 퇴계는 둘 중 교육을 더 중요시했다. 상주는 우복(愚伏) 정경세, 창석(蒼石) 이준(李埈),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등 영남학파의 적맥을 계승한 학자들의 고장이었다. 이른바 강회를 주관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유수의 학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류성룡의 핵심 문인인 정경세와 이준, 안동에서 이거해 온 서애의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津)이 포진해 있는 서애학맥의 근거지였다.

상주의 서애문인들은 임란 시에는 의병활동을, 임란 후에는 사족을 대변하는 낙사계(洛社契) 결성과 우리나라 최초 사설의료기관인 존애원(存愛院) 설립, 향약 시행 등 향촌 복구사업 전반을 기획하고 주도하여 그 위상은 남달랐다. 정경세가 세상을 떠난 후 서원에 추가배향이 된 것은 영남학통의 적통 계보를 정립함과 동시에 서애, 우복 학단의 남인계 서원으로서의 성격을 대내외에 분명히 한 것이었다. 도남서원의 초대 원장인 조정(趙靖)의 손자 조릉(趙稜)은 '도학의 연원은 낙수(洛水)에서 찾을 일, 도원은 영남 사림의 으뜸 일세'라고 하여 자부심을 드러냈다. 당시 낙동강에서 안동으로 올라가는 소금배도 서원 앞을 지날 때는 돛을 내려야 했다 한다.

#2. 낙강시회

솟을삼문 앞 낙동강 가에 '낙강범월시유래비(洛江泛月詩由來碑)'가 서 있다. 옛날 상주의 선비들은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술 마시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그러한 시회(詩會)와 그때의 작품들을 아울러 '낙강범월'이라 한다. 연원은 아주 깊다.

고려 명종 때인 119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로 온 대문호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의 '낙강범주시회(洛江泛舟詩會)'가 그 시작이다. 이후 '낙강시회'는 철종 때인 1862년 계당 류주목에 이르기까지 666년 동안 총 51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시회는 문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행사였다. 정기적인 시모임인 시사(詩社)가 조직되기도 했고 서원의 강회를 전후해 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도남서원에서는 낙성 이듬해인 1607년 9월 처음 배를 띄워 시회를 가졌다. 이때 읊은 시의 내용을 보면 단순한 선유가 아니었다. 참석자들은 임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상주 출신 전·현직 관료들이었고 그날의 시회는 울분의 심정과 우국(憂國)을 추동하는 자리였다.

이후 도남서원에서 전개된 시회의 양상은 크게 3가지다. 하나는 1607년 첫 시회부터 정조 2년인 1778년까지 171년 동안 8차례 개최된 '낙강범월시회'다. 역대 시회에서 나온 상당수의 작품들은 영조 47년인 1771년에 하나의 책자로 묶였는데 바로 상주 시인들의 공동시집인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 일명 '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이다.

또 하나는 홍여하의 '도남서원강당중수시(道南書院講堂重修詩)'에 대를 이어 차운한 목재시단(木齋詩壇)이다. 목재시단은 현종 4년인 1663년부터 정조 22년인 1798년까지 135년간 서(序) 3편과 시 109수를 남겼다. 그리고 이만부, 권상일, 정종로 등 개별 학자들이 서원 강학 후 진행한 문회 및 시회가 있다. 이 3가지를 통칭해서 '낙강시회'라 부른다.

낙강시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622년 7월에 열린 창석 이준의 낙강범월시회다. 이준은 읍지인 상산지의 편찬, 향약 보급, 학교의 활성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상주를 문향의 반열에 올린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또 당대 문장가답게 많은 시를 남겼는데 청백리로 이름난 이원익도 이준이 보내준 시를 아들에게 가보로 삼게 할 정도로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는 시회를 열며 '1082년 7월 송나라 소식(蘇軾)이 호북성에서 적벽부(赤壁賦)를 남긴 9갑(甲)을 맞이해 이를 재연하기 위함'이라 했다. 시회에서는 25명이 508연구(聯句)의 공동 장편시를 창작했다.

시집이 완성되자 이준은 서문 끝자락에 중요한 당부를 적었다. '간략히 일의 전말을 써서 책머리에 놓아 도원에 갈무리하여 뒷날 이 놀이를 잇는 자의 선구가 되고자 한다.' 도원을 출입하는 후학들에게 시회의 전통을 계승하기를 피력한 말이다. 실제 도남서원의 후학들은 한말까지 이준의 당부를 충실히 수행하고 전승시켜 나갔다. 이준은 시회를 서원의 전통으로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1723년 도남서원의 원장을 지냈고 정허루기(靜虛樓記)와 일관당중수기(一貫堂重修記) 등을 쓴 정종로는 1816년에 강회를 열었다. 생을 마감하기 3개월 전이었고, 강회에는 수백 명이 참석했다. 그는 강회 후 생전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시 1수를 남겼다.

'예전에는 강가 서원에서 이 가을을 만나면, 선배들이 서로 불러 배 띄워 달을 감상했네. 동파의 문장에야 누가 비슷할 수 있겠는가, 교남의 좋은 풍광은 여기가 더욱 좋아라. (중략) 시험 삼아 미인가(美人歌) 한 곡조를 부르며, 서풍에 머리 돌리니 눈물 거두기 어려워라.'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며 시를 읊었던 흥취는 지금도 도남서원에서 매년 개최되는 낙강시제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도남서원은 2005년 창석 이준을 추가 배향해 현재 아홉 선현을 모시고 있다. 향사일은 매년 음력 2월, 8월이 하정일(下丁日)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상주시 누리집. 서원연합회 누리집.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채광수, 서원의 지식 네트워크 활동의 실제, 상주 도남서원의 시회를 중심으로, 한국서원학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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