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4] 석계 이시명과 여중군자 장계향...정묘·병자호란때 도토리죽 쒀 굶주린 피란민 수백명 구휼

  • 류혜숙 작가
  • |
  • 입력 2021-08-10   |  발행일 2021-08-10 제12면   |  수정 2021-08-2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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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두들마을에 자리한 음식디미방체험관. 여중군자 장계향이 지은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음식을 직접 맛보고 조리해 볼 수 있다. 장계향은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였고, 이웃들에게는 진심을 다해 베풀어 '여중군자'라 불렸다.

화사한 화매천(花梅川) 변에 두두룩하게 언덕진 땅이 있다. 그래서 언덕을 뜻하는 우리말로 '두들'이라 했다. 이곳을 개척한 이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과 그의 부인 장계향(張桂香)이다. 그들의 시대는 광해군의 난정과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어지러웠다. 석계는 '시대는 어둑어둑 바야흐로 쇠하려 하고 밤은 길고 길어 새벽이 오질 아니했네'라 표현했다. 그는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은거하여 깊이 공부하고 널리 가르쳐 영양의 문풍을 크게 일으켰다. 석계의 부인 장계향은 어려서는 총명했고 커서는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였다. 이웃들에게는 의로써 베푸니 당대 사람들은 그녀를 '여중군자'라 칭하였고 오늘날에는 '의현당(宜賢堂)'이라 부른다.

석계부부 상속지분도 안받고 분가
두들마을에 많은 도토리나무 심어
가뭄에 힘들었을때 곡식으로 대신
지금도 마을뒷산에 도토리나무 무성
낙기대서 보릿고개때 식량 나눠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의 삶'실천


#1. 이시명과 안동장씨 장계향

이시명은 선조 23년인 1590년 영해 인량리(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운악(雲嶽) 이함(李涵)의 셋째 아들로 자는 회숙(晦叔)이다. 10대 초반에는 조부를 따라 한양에서 수학했고 1607년 부친이 의령현감에 제수됐을 때는 임지에 따라가 글 읽기에 몰두했다. 이런 이시명을 보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佑)는 '벼슬하는 집 자제들은 노래나 기생, 음주, 도박을 일삼지 아니함이 없는데 지금 네 절조의 높음이 이와 같으니 그 성취할 것은 가히 헤아릴 바가 아니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이시명은 1609년경에 의병장을 지낸 광산김씨(光山金氏) 김해(金垓)의 딸과 혼인했다. 이후 안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그때부터 경당에게 묻고 배웠다. 광해군 4년인 1612년에는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 갔지만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고 향리로 내려왔다. 하지만 1614년 첫 번째 부인 광신 김씨가 어린 1남 1녀를 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1616년, 스승 경당의 무남독녀인 19세 장계향과 혼인했다.

장계향은 선조 31년인 1598년 경북 안동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경당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벼슬도 마다한 채 평생 학문을 논하며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경당이 서른다섯 살 되던 해에 얻은 아이가 장계향이었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장계향은 '소학'을 통째로 외운 뒤 의심나는 부분을 아버지에게 물었다고 한다. 시도 지었다. 전하는 대표적인 시가 10세 전후에 쓴 '비 내리는 소리(蕭蕭吟)'다.

'창밖엔 보슬보슬 비 내리고/ 보슬보슬 빗소리 절로 들려오네/ 저절로 나는 빗소리 듣고 있으면/ 내 마음 어느새 빗소리 되네.'

이 시는 장계향이 '시경(詩經)'의 대아편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딸의 비범함을 눈치 챈 경당은 공부가 오히려 걱정됐다. 그래서 경당은 '예기(禮記)'를 많이 읽도록 권했다. 장계향은 예기에서 '여자는 재능 가진 것이 허물이 된다'는 구절을 발견하고 만다. 이후 그녀는 재능을 감추고 오직 부덕(婦德)을 닦는 데 열중했다.

향시합격으로 받은 토지로 농사짓고
황무지 개간하며 자식교육·후학 양성
일곱아들 모두 학자 '7현자'로 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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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을 기리는 '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


#2. 영양 두들에서의 삶

시집살이를 하며 장계향은 노비들을 데리고 길쌈으로 옷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빈민들이 겨울 추위에 얼어 죽는 것이 가장 무서운 고통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간단한 의약 처방을 배워 걸인을 도왔다.

1623년 인조가 등극하자 이시명은 다시 과거에 응시한다. 이듬해 그는 향시 별과에서 1등을 차지했다. 아버지 운악은 그런 아들에게 영해와 영양 경계지역의 좋은 논 여섯 마지기를 사주었다. 이시명이 5년 뒤 다시 향시에 합격하자 운악은 이번에도 영양에 논을 구입해 주었다. 그러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그해 봄부터 여름까지 장계향은 시아버지 운악과 함께 밀려드는 피란민을 구휼했다.

1631년 이시명·장계향 부부는 영양 두들에 작은 집을 지어 분가했다. 이때 장계향은 마을에 많은 도토리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몇 달 사이 운악이 위독해져 다시 인량리로 돌아가야 했다. 이듬해 운악이 타계했다. 이어 1633년 경당마저 세상을 떠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장계향은 시아버지 운악의 빈자리를 스스로 메워 주도적으로 구휼에 나섰다. 곡식이 떨어지자 도토리를 주워 집 밖에 솥을 걸고 죽을 쑤었다. 그렇게 하루 300명을 구휼했다.

이시명은 '숭정처사'라 자처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강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에 비분강개하고 있던 석계는 1640년 두들로 돌아와 은거했다. 석계 위에 집을 짓고 이때 자신의 호를 '석계(石溪)'라고 했다. 그리고 석계초당(石溪草堂)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석계 부부는 분가하면서 상속지분을 전혀 챙기지 않았다. 노력해서 일군 것이 아니면 가지지 않았다. 향시 합격으로 아버지께 받은 토지가 전부였다. 가난한 생활이 시작됐다. 다행히 9년 전 처음 두들에 들어왔을 때 심어두었던 도토리나무가 위안이 되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자식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석계 부부는 일곱 아들을 뒀는데 첫째는 전처소생인 정묵재(靜默齋) 이상일(李尙逸)이다. 둘째는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셋째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넷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다섯째 정우재(定于齋) 이정일(李靖逸), 여섯째 평재(平齋) 이융일(李隆逸), 일곱째는 이운일(李雲逸)이다. 모두 학자로 이름이 높아 '7현자'라고 불렸다.

장계향은 자식들에게 강조했다. '너희가 비록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지만 나는 그 일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너희들이 선행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도 기뻐하며 잊지 않을 것이다.'

장계향 일흔다섯에 '음식디미방'작성
머리글 빼고 한글로 쓴 최초의 요리서
17세기중엽 식생활 실상 알려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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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 부부가 살았던 석계고택.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되어 있다.


#3. 수비에서의 삶, 그리고 다시 두들

1653년 석계 부부는 수비(首比)로 터전을 옮겼다. 영양의 동북쪽 끝, 첩첩산중인 두메산골이었다. 수비에서는 '휴문(休問, 묻지 마라)'이라는 편액을 달고 살았다.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수해와 한해로 창고는 텅 비었네. 온 식구가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해 아우성이었지만 그 누굴 의지할 수 있었으랴. 도토리를 주워 곡식을 대신했고, 소나무 껍질 벗겨 삶아 먹었네. 이로도 오히려 죽지 않은 것을 만족하며 애오라지 분수로 생각하고 가난을 즐겼네. 요컨대 마음은 어느 곳에 두었는가. 배움에 두었을 뿐이었네. 이 즐거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아노라.'

석계는 거처하는 집을 서산서당(西山書堂)이라 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1655년에는 영산서당 당장(堂長)으로 있으면서 서당의 서원 승격을 추진해 이루어냈다. 자식과 후학들에게 공부에 힘쓰도록 하면서 황무지였던 땅을 개간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석계 부부는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며 20년을 수비에서 살았다.

그리고 1672년 극심한 가뭄으로 나라가 흔들릴 때 일흔 다섯의 장계향은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후손들을 위한 요리책 '음식디미방'을 썼다. 음식디미방은 17세기 중엽 우리 조상들이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먹었는지 식생활의 실상을 알려 주는 책이다. 책에는 무려 146가지 음식 조리법이 나온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것이 있고 스스로 개발한 음식도 있다. 머리글 한시를 빼고는 모두 한글로 썼다. 최초의 한글 요리서다.

석계 부부는 1672년 12월 자손의 성장과 앞날을 생각해 다시 안동 도솔원(兜率院, 안동 풍산읍 수곡리)으로 옮겼다. 마을 이름을 대명동으로 고치고 선비들의 존경을 받으며 후진 양성에 힘쓰던 석계는 그해 운명했다. 그는 경당 장흥효로부터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의 학문을 모두 전수 받았다. 이러한 학통은 다시 아들 이휘일과 이현일에게 전해져 영남학파와 퇴계학파의 발전과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석계가 살던 수비의 유거지에는 훗날 후학들이 세운 '석계이선생수산유허비(石溪李先生首山遺墟碑)'가 남아 있다.

석계가 세상을 뜬 후 장계향은 셋째아들 갈암과 넷째아들 항재와 함께 두들마을로 돌아왔다. 석계의 선업을 이은 이는 항재였고, 그는 아버지의 석계초당에서 강학을 이어나갔다.

훗날 후손들은 석계가 강학하던 석계초당을 퇴락한 채 그대로 둘 수 없다며 개축해 석천서당(石川書堂)을 세웠다. 서당은 1770년 공사를 시작해 1771년에 완공했다. '계(溪)'자를 '천(川)'자로 바꾼 이유는 감히 석계의 호를 서당 이름으로 붙일 수 없어서였다고 한다.

장계향은 1680년 두들에 있는 넷째아들 항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두들마을에는 석계부부가 살았던 석계고택이 남아 있다. 또한 장계향을 기리는 '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와 영정을 모신 존안각(尊安閣), 그녀가 쓴 음식디미방을 체험해볼 수 있는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등이 있다. 화매천변에는 석계가 짓고 항재가 새겼다는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남아 있다. 이곳 낙기대에서 보릿고개로 힘든 주민들에게 구휼식량을 나누었다고 전한다.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부터 시작된 이러한 전통은 광복 직전까지 지속됐다. 두들에는 지금도 그녀가 심은 도토리나무가 400년을 이어 무성하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영양군지.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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