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5] 오시준·수눌 부자…무인 가문으로 임진왜란·정유재란때 왜적과 싸워 큰 공 세워

  • 류혜숙 작가
  • |
  • 입력 2021-08-24   |  발행일 2021-08-24 제12면   |  수정 2021-08-24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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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준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감천마을로 돌아와 지은 연소정. 그는 연소정에서 송강 정철 등과 교류했고 청계 김진과 서로 따르며 의좋은 벗으로 지냈다. 당시 송강은 오시준과 같은 인재가 벼슬에서 물러나 크게 등용하지 못함을 한탄했다고 한다.

영양의 일월산(日月山)에서 발원한 반변천(半邊川)은 낙동정맥의 남북 방향을 따라 깊은 골짜기를 그리며 흐르다가 영양읍의 남쪽에 이르러 활처럼 굽이지며 서늘한 단애를 세운다. 직립한 벼랑에는 푸른 측백나무들이 창처럼 솟았고 모감주나무와 털댕강나무가 만군으로 뒤따른다. 단애로부터 점차 물러나 구릉을 이룬 땅은 큰 내가 마을 앞을 흐른다고 '감천(甘川)'이라 한다. 양편이 산으로 둘러싸였지만 양지 바르고 구릉진 땅의 형세 그대로 집들이 들어 앉았고, 기와를 얹은 흙돌담 길은 부드럽게 울렁인다. 감천마을은 낙안오씨(樂安吳氏) 집성촌이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는 오원로와 그의 아들 오시준(吳時俊)이다. 오원로·시준 부자는 영해에서 대대로 세거하다 영양 감천마을로 입향한다. 시기는 1560년경으로 짐작된다. 특히 통정대부를 지낸 오시준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감천으로 돌아와 단애 앞에 정자를 짓고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오시준, 용맹스러운 장군이었고
덕과 애민으로 선정을 베푼 현감
백성들 송덕비 세워 선정 기리기도
임기 후 감천에 돌아와 만년 보내
연소정 짓고 정철·김진 등과 교류

"나라님 은덕 입었으니 충성하라"
아들 오수눌도 무과 급제후 활약
김성일·권율·곽재우·정기룡 등과
전공은 다투지 않고 전투에 참여
이원익, 경탄하며 명장이라 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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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헌종택 뒤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사당인 충효사(忠孝祠)가 자리한다. 오수눌은 사후 1766년에 정3품 어모장군에 증직되었고, 1799년에는 충효사에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다.

#1. 오시준과 연소정

오시준은 중종 22년인 1527년 영해에서 태어났다. 자는 언중(彦中)이다. 훈련참군별시위(訓練參軍別侍衛) 오명동(吳命同) 장군의 손자이며, 오원로(吳元老)의 아들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 가문이었다. 오시준이 언제 감천에 정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570년경 감천마을의 뒷산 너머 청기면에 청계(靑溪) 김진(金璡)이 우거하고 있었는데, 그때 청계가 서당 건립을 주창하고 오시준 등 16인이 발기해 곡물을 출자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을 근거로 오시준의 감천 입향은 그보다 앞선 1560년경으로 짐작된다.

오시준은 명종 17년인 1562년 무과에 응시해 장원으로 급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됐다. 그는 체력과 용맹이 뛰어났고 육도삼략(六韜三略)에 통달해 전술과 전략 모두에서 출중한 장군이었다고 전해진다. 선조 12년인 1579년에는 창주진관구(昌州鎭管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제수받았다. 이때 선조는 그의 재주와 무예를 높이 사 진서(陣書)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하기도 했다. 선조 17년인 1584년에는 칠원현감 겸 진주진관 병마절제사로 부임해 덕으로 다스리는데 힘썼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백성들은 '오시준현감애민선정송덕비(吳時俊縣監愛民善政頌德碑)'를 세워 그의 선정을 기렸고, 나라에서는 그의 자질을 칭송하여 원사비(遠射碑)를 훈련원(訓練院)에 세웠다고 한다.

임기를 마치고 감천으로 돌아온 그는 정자를 짓고 소일하며 만년을 보냈다. 그의 정자인 연소정(蓮沼亭)이 마을 앞 반변천 변에 있다. 침벽공원 또는 감천유원지라 불리는 소나무와 느티나무의 숲을 가로질러 오솔길을 따라간다. 측백나무가 숲을 이룬 단애와 함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오솔길 끝 사각의 석축 위에 흙돌담을 두른 연소정이 자리한다. 정자의 동쪽에서 남쪽으로 반변천이 흐르고 북쪽과 서쪽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서쪽의 밭을 가로지르면 감천마을과 가깝게 연결된다.

사주문에 들어서면 정자의 정면과 대청 문 위 두 곳에 걸려 있는 연소정 현판이 보인다. 기백이 넘치는 글씨다. 연소정은 오랜 세월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연소정기(蓮沼亭記)에 따르면 현재의 정자는 1960년 중양절(重陽節)에 중건한 것이다.

감천으로 돌아온 오시준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연소정에서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과 교류했고 청계 김진과 서로 따르며 의좋은 벗으로 지냈다. 특히 송강 정철은 장군 같은 인재가 벼슬에서 물러나 당세(當世)에 크게 등용하지 못함을 한탄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였다. 이미 연로한 그는 둘째 아들인 오수눌(吳受訥)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휘하로 보내며 명했다.

'우리 가문은 원래 세세무신(世世武臣)으로 나라님의 두터운 은덕을 입었으며, 나도 무과 급제해 특히 손오병서를 하사(下賜) 받자왔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 할 오늘날을 당하여 네가 내 뜻을 대행(代行)하되 반드시 몸 바쳐 나라 위해 충성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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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마을의 연못 삼천지 오른쪽 가장자리에 자리한 감호헌. '호수에 자신을 비춰 보는 집'이란 뜻으로 오수눌의 호를 따 '국헌종택'이라고도 부른다.

#2. 오수눌과 국헌종택

오시준의 둘째 아들 오수눌은 1565년 감천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신(士愼), 호는 국헌(菊軒)이다. 감천마을 안쪽에 삼천지라 부르는 연못이 있다. 동쪽 제방의 경사진 사면에는 노송들이 열을 지어 서 있는데 깜짝 놀랄 만큼 멋있는 나무들이다. 제방 길은 근래에 정비했지만 연못과 나무들은 아주 오래 마을과 함께한 듯하다.

연못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낙안오씨 종택인 감호헌(鑑湖軒)이 자리한다. '호수에 자신을 비춰 보는 집'이다. 이곳은 오수눌의 종택으로 그의 호를 따 '국헌종택'이라고도 부른다. 종택은 문중에서 1800년대에 건립했고 현재 남은 건물은 기존의 종택 건물을 철거하고 1960년에 신축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오수눌은 27세였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김성일의 휘하에서 왜적과 싸워 여러 번 공을 세웠다. 또한 영해부사 한효순(韓孝純)의 창의에 가담해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수십 명을 참수하기도 했다. 당시 의주(義州)에 몽진해 있던 선조에게 남쪽의 전황을 알리기 위해 주건(朱楗)·김봉정(金鳳楨)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니 선조가 감탄했다고 한다. 1593년에는 권율(權慄) 장군의 진영에 가담해 공을 세우는데 일조했다.

오수눌은 선조 27년인 1594년에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했다. 그해 가을에 곽재우 의병장을 만나 의령에 주둔했는데 당시 왜병이 인근 해안으로 퇴각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배를 타고 동래까지 달려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으로 그는 선무랑군자감주부(宣武郞軍資監主簿), 창신교위훈련원판관(彰信校尉訓練院判官), 현신교위훈련원첨정(顯信校尉訓練院僉正) 등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정기룡(鄭起龍)의 부대장으로 28개 군의 관병을 거느리고 고령 녹가전(綠價田)에서 적을 토벌했고 용담천월변(龍淡泉越邊)에서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왜적 수만명을 참살했다. 그는 적의 왼쪽 귀를 잘라 달구지에 싣고 체찰사 이원익에게 인계했는데, 이원익은 경탄하며 명장이라 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오수눌은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으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했을 뿐"이라며 전공을 다투지 않았다.

그는 선조 36년인 1603년에 정략장군 훈련원 습독관(定略將軍 訓練院 習讀官)을 지냈고 1605년에는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오수눌은 '선무원종공신록'에 이름을 올렸다. 무관으로서 맡겨진 의무를 끝낸 그는 귀향해 부모님을 봉양하며 종신토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광해군 2년인 1610년 어머니 한씨(韓氏)의 병이 극심했을 때 그는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로 어머니를 살려냈다. 한씨는 그로부터 8년을 더 살았다. 아버지 오시준은 광해군 5년인 1613년 감천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87세였다.

오수눌은 1631년 66세 때 감계정사(甘溪精舍)를 짓고 매년 중양절에 오랜 벗들과 함께 국화주로 즐기며 호를 '국헌'이라 했다 한다. 그는 1648년에 세상을 떠났다. 국헌종택 뒤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사당인 충효사(忠孝祠)가 자리한다. 오수눌은 사후 1766년에 정3품 어모장군에 증직되었다. 1799년에는 충효사에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다.

아버지 오시준은 무예가 드높았던 장군이었고 덕과 애민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현감이었다. 또한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과 벗한 선비였으며 고장의 선비를 길러 문풍(文風)을 떨치는데 기여했던 어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인의 기백과 충성심을 아들에게 심어준 아버지였다. 오수눌은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지금 감천마을에는 오수눌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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