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6] "왜놈 도적에게 보복하리라" 오극성·윤성 형제의 탁월한 지략 '난형난제'

  • 류혜숙 작가
  • |
  • 입력 2021-09-07   |  발행일 2021-09-07 제12면   |  수정 2021-09-0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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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영양읍 대천1리 황골에 자리한 오극성 고택. 1559년 대천리에서 태어난 오극성은 임진왜란 당시 동생 오윤성과 함께 큰 공을 세운 영양의 인재로, 두 형제 모두 이순신 장군을 도와 적을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큰 내가 흘러 대천이라 했다. 산들이 가까이 늘어서 있지만 들은 부족함 없이 느껴진다. 대천1리 황골 버스정류장 옆으로 좁은 개울을 따라 들어간다. 가지런히 경작된 밭 한 배미를 지나면 산줄기가 동그마하게 내려앉은 자리에 오래된 집이 보인다. 오극성(吳克成) 고택이다. 오극성은 임진왜란 때 아우인 오윤성(吳允成)과 함께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 왜적과 싸울 때 형제는 바로 그곳에 있었고, 두려움 없는 기개와 비범한 지혜로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형제의 무훈(武勳)을 난형난제라 칭송했다.

이순신 휘하에서 왜에 맞서 싸워
형제가 병법을 익혀 전략도 제시
임진왜란때 전국 곳곳서 공 세워
사람들은 형제를 '난형난제' 칭송

선조때 선전관으로 있던 오극성
자진해 전투 벌어지는 전국 돌며
전쟁상황 조정에 보고 극찬 받아
노량해전땐 군복 허수아비 세워
낙향후 문월당서 詩와 술로 보내
마음속에는 나라·백성 안위 걱정

명량대첩 승리에 일조한 오윤성
수십 척의 어선을 군선으로 위장
수적 열세극복하고 왜군 물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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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성 고택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어 있다.

#1. 오극성·윤성 형제

오극성은 명종 14년인 1559년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이다. 할아버지는 조선 초기 창신교위 중부장을 지낸 오필(吳필)이다. 아버지는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지낸 경암(敬庵) 오민수(吳敏壽)로 청계(靑溪) 김진(金璡)과 함께 지역 최초의 교육기관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설립한 선비였다. 어머니는 무안박씨 참봉 박붕(朴鵬)의 딸이다.

오극성은 천성이 영민했고 조용히 학문을 닦는 가운데 틈틈이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무인인 할아버지와 문인인 아버지 모두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극성의 아우인 오윤성은 1563년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립(誠立)이고 호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지략이 출중하고 부모형제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고 한다. 형제는 함께 공부하며 자랐다.

임진왜란 전인 1591년 3월 즈음, 영천의 정세아(鄭世雅)가 오극성의 집을 찾아왔다. 당시 정세아는 57세, 오극성은 32세였다. 정세아는 오극성의 책상에 있는 병서(兵書)를 보고 말했다.

"그대는 선비인데 어째서 군사와 관련되는 책을 그리 많이 읽는가?"

"제가 비록 선비이지만 병법(兵法)을 잘 안다면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극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당시 정세아는 무(武)와 거리가 멀었지만 오극성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이듬해인 1592년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오극성은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전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왜놈 도적에게 보복하리라(報倭寇)'라는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걸어두고 늘 바라보며 더욱 병법을 익히고 몸과 마음을 단련시켰다. 당장 출전할 수 없었던 오극성은 선조를 호위하고 있는 윤두수, 예천에서 창의를 준비하고 있는 류복기, 이미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 일원에서 활약 중인 곽재우에게 편지를 보냈다.

윤두수에게는 병사의 모집과 군량미 비축, 무기 제작 방법에 대해 썼고, 류복기에게는 하루라도 빨리 군사를 일으켜 달라고 당부했다. 곽재우에게는 기습 공격이 아군에게 유리한 전술일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김성일에게도 서신을 보냈는데, 경상도를 지키지 못하면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는 쉽게 무너질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1594년 1월15일, 오극성과 오윤성은 권무과(勸武科)에 응시해 나란히 급제했다. 오극성은 말을 잘 타고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나 임금을 호위하는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아우 오윤성은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보좌하는 수군 장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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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성 고택에서 백여 걸음 남쪽에 위치한 문월당(問月堂). 오극성의 정자로 문월당은 그의 호이다.

#2. 난형난제의 무훈(武勳)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최대 격전지에서 싸우고 있는 수군통제사 이순신, 도원수 권율(權慄) 등의 상황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무도 적들이 우글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오극성은 자진해서 그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일반 백성의 옷을 입고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이면 산길 등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서 이동하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국을 순회했다.

목숨을 걸고 어려운 임무를 완수한 오극성은 이 일로 조정의 큰 신임을 얻었다.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이 사람 참으로 충신이다'라고 극찬했다. 마침내 오극성은 종9품 선전관에서 종6품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가 됐다. 과거에 합격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1596년에는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부임했다. 그는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던 아우 오윤성은 1597년 명량대첩 때 뛰어난 지략으로 승리에 일조했다. 명량대첩은 단 열세 척의 배로 일본군 330척과 맞붙은 격전이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의 참모였던 오윤성은 판옥선 뒤에 수십 척의 민간인 어선으로 위장해 뒤따르게 하자는 계책을 낸다. 결국 적들은 조선 수군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1598년에는 오극성도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 동생과 함께 노량해전에 참전했다. 오극성은 해안선을 따라가며 군복 차림의 허수아비들을 세웠다. 적들은 허수아비들을 보고 자신들이 포위된 것으로 착각했고 우왕좌왕하던 끝에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군이 공격을 개시해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오극성·윤성 형제의 무훈(武勳)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난형난제'라 칭송했다.

#3. 대천리 오극성 고택과 문월당

오극성은 이후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과 봉상시정(奉常寺正) 등을 역임하고 1602년에는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시독관(侍讀官)이 됐다. 무과 출신으로 시독관에 임명된 예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 즈음 한 고위 관리가 더 높은 벼슬을 제안하며 그의 말을 탐냈다고 한다. 오극성은 '나라의 관직과 재물을 어떻게 사고판다는 것이오' 하며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 대천리로 돌아왔다.

현재 대천1리 황골(篁谷)에 오극성 고택이 있고 그로부터 백여 걸음 남쪽에 그의 정자인 문월당(問月堂)이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극성이 정자를 짓고 문월당이라 편액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가 귀향하기 전 이미 저택과 정자가 있었다고도 한다. 이후 화재로 모두 불타버리자 그는 영양 서부리로 이사했고, 다시 수비면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오극성 고택은 1760년경 현손인 오학지(吳學智)가 개수했다. 고택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문월당은 오래 중건되지 못하다가 1969년에 주손인 오창목(吳昌穆)이 주도해 다시 세웠다. 가파른 비탈면에 기대어 정면과 측면에만 담장을 두르고 오른쪽 측면에 2칸 규모의 대문을 내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측으로 2개의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 한 칸 대청을 열었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두었다. 온돌방 상부에 유리창을 내었는데 근대적인 실용성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오극성의 호 '문월'은 이백의 시 '술잔을 잡고 달에 묻는다(把酒問月)'에서 취한 것이다. 그가 남긴 많은 시문 가운데 '제문월당(題問月堂)'이라는 아름답고 저린 시가 있다.

'옛날의 달은 지금의 달과 같은데/ 지금 시절은 옛 시절 아니구나/ 술잔을 멈추고 기다린 지 오래인데/ 봉우리에 솟는 일 어찌 그리 늦나.'

그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날마다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지만, 마음에는 늘 충절을 품고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근심했다. 오극성은 선조 38년인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서훈됐고, 광해군 8년인 1616년 11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둔 그는 자손들에게 경계하여 말했다.

'내 평생 나라에 보답하기를 다하였으나 죽어도 오히려 한이 남는다. 너희는 부지런히 배우고 입신양명하여 임금 섬기기를 아비 섬기듯 하면 아비의 뜻을 체득한 효도가 아니겠느냐.'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왕명으로 편간된 '이충무공전서'에 '오극성은 무과에 급제한 후 현감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진중의 무공으로 녹훈하였다'라고 기술되었다. 오윤성은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으며 1627년에 세상을 떠났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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