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13] 소설가 이문열, 문향의 고장 두들…그의 작품속 인물 삶의 무대로 자주 등장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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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07   |  발행일 2021-12-07 제12면   |  수정 2021-12-1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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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열이 2001년 두들마을에 지은 광산문학연구소. 그는 '녹동고가 광고신택'이라는 현판을 단 이곳을 '자신의 집이면서 개인 창작실이고 후배를 위한 소설 사랑방 같은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긴 돌담과 큰 대문간 속에 학사, 강당, 사랑채, 서재, 대청, 식당, 정자 등이 'ㅁ'자로 들어서 있다.

두들은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이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갓난아기 때인 1950년부터 4년, 10대 시절에 3년,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고 2년 뒤 돌아와 3년을 살았다. 서울, 안동, 밀양, 부산 등 도시와 도시를 옮겨 다녔지만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부터는 수십 년을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집안의 제사에 참여했고 그때마다 근 일주일을 머물렀다. 문중은 그의 뿌리였고 두들은 좌표의 영점이었다. 2001년 그는 고향 두들에 서재이자 집필실이고 동시에 사랑방인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 '광산문학연구소'다. 그것은 '마침내 내가 돌아갈 곳'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음식디미방 집필한 장계향의 후손
300년된 석간정사서 어린시절 보내
작품에서 고향·문중 자부심 드러내

2001년엔 '광산문학연구소' 건립
서원 염두에 두고 장서 2만권 보내
학사·강당·사랑채·정자 등 들어서
"후배 위한 소설 사랑방 같은 공간"
'이문열 문학관' 내년에 완공 예정


#1. 고향 두들

이문열은 1948년 5월18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열(李烈)로 아버지 이원철(李元喆)이 지어준 이름이다. 대학교수이자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했다. 그해 그의 어머니는 세 살 갓난아기였던 그를 데리고 고향인 두들로 왔다.

두들마을은 재령이씨(載寧李氏)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석계 이시명이다. 그는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부인은 안동장씨 장계향으로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집필한 여중군자로 이름 높다. 장계향은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석계선생의 선업을 이은 이는 넷째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로 이문열은 항재의 12세손이다. 그는 두들마을의 석간정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조상 때부터 10대에 걸쳐 300여 년을 살던 집이다. 원래 이름은 여산정사(廬山精舍)로 이문열의 5대조인 좌해 이수영의 살림집이자 서실이었다. '여산'은 마을 뒷산인 광려산(匡廬山)에서 따 온 이름이라 한다.

이문열의 두 번째 귀향은 열세 살 때다. 그는 밀양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족 모두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야산을 개간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두들을 오르내리며 어머니의 회상 속에 존재하는 영화로웠던 고향의 현재를 10대의 눈으로 보았다. 이문열은 '그때 처음으로 문중이란 것을 알았고, 자연과의 친화를 경험했으며, 노동과 생산을 이해하게 되었다'(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1994)고 한다. 그리고 '아름드리 참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자 상상 속에서나 그려보았던 덩그런 기와집들이 잇따라 나타나 이미 도회적인 안목으로 내게 느닷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 뒤 사흘 고향에 머물면서 들은 자기 옛 고향의 영광은 그것을 한때의 충격에서 깊은 감동으로 키워 마침내는 뒷날의 내 의식에까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변경, 1986)

그는 1964년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다시 고향을 떠났지만 1년 만에 중퇴하고 한동안 주먹질로 세월을 축내며 떠돌았다. 그러다 1968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한다. 그 시절의 방황과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 '그해 겨울(1979)'이다. 그는 대학생 시절인 1969년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동시에 1970년 2년 만에 대학을 그만두고 사법시험에 도전한다. 그의 세 번째 귀향은 이때로 여겨진다.

이문열이 고향을 세심한 눈길로 관찰하게 된 것이 이 시기이며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0)'의 소재 대부분을 이때 얻었다고 한다. 그는 사법시험에 세 번 실패한 뒤 결혼을 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1976년 대구로 이사했다. 그리고 1977년 대구의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입선,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이 당선되어 중앙 문단에 들어섰다. 그리고 잇따라 '사람의 아들(1979)' '들소(1979)'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1979)' '어둠의 그늘(1980)' '황제를 위하여(1980~1982)' '달팽이의 외출(1980)' '이 황량한 역에서(1980)' 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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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고향 두들마을. 두들은 이문열의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던 무대이기도 하다. 사진 아래는 광산문학연구소 옆에 있는 한옥 북카페 '두들책사랑'.


#2. 이문열의 집 '녹동고가 광고신택'

2001년 이문열은 고향 두들에 '광산문학연구소'를 지었다. 그리고 장서 2만여 권을 내려보냈다 한다. 그는 이곳을 지을 때 일면 서원(書院)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늙어가면서 젊은 친구들과 함께 글을 이야기하는 공간, 서로 주고받는 강학(講學)의 공간, 내가 더 많이 공부하는 집(宇)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고래등 같은 집이다. 긴 돌담과 큰 대문간 속에 학사, 강당, 사랑채, 서재, 대청, 식당, 정자 등이 'ㅁ'자로 들어서 있다. 그가 1990년 중반 고향 집을 찾아왔을 때 이미 주인이 바뀌어 있었고 당호 역시 '여산정사'에서 '석간정사'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고향 집을 매입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그는 인근에 새집을 짓고 '광산문학연구소'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대문에 '광산문우(匡山文宇)'라는 현판을 달았다. '광산'은 '여산'의 맥을 잇는 이름이다.

2018년 그는 '광산문우'의 현판을 내리고 '녹동고가 광고신택(鹿洞古家 廣皐新宅)'이라는 새 현판을 걸었다. 그는 이곳을 '그냥 개인 창작실이고 개인 서재고 후배를 위한 소설 사랑방 같은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새로운 집'과 '장계향 예절관' 사이에 '여산정사' 현판이 걸린 세 칸 기와집이 높은 석축 위에 앉아 있다. 그의 새집과 옛집은 담을 공유하며 좁은 문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뒤쪽으로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 펼쳐져 있다.

입향조인 석계 부부는 두들에 터를 잡으면서 도토리를 얻을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리고 왜란과 호란으로 궁핍해진 이웃에게 도토리 죽을 끓여 나누었다. 두들에는 지금도 상수리나무가 많다. 수령 370년이 넘는 고목이 50여 그루에 이른다. 오늘날 그의 새로운 집 뒤편의 언덕은 '도토리 공원'이라고 불린다. 주변으로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는 참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도토리 공원'에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연작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서 그는 고향과 문중에 대한 향수를 드러냈다. '풍화된 화강암 언덕 위에 서식하던 참나무붙이가 당당하던 시절, 늘어선 수십 칸 고가들이 그림처럼 서 있고, 그 한 곳 서당 대청에서는 낭랑한 강 소리가 울려 퍼지던 시절, 몇 년마다 한 번씩 문중 출신의 현관들이 임금의 하사품을 실은 나귀와 종복들을 앞세우고 퇴관해 오고, 가을이면 인근 소작지의 아름드리 거둔 나락바리를 인도해 분주하게 그 언덕을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고…. 향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이제 저기에 광고신택이 있다. 넓은 언덕의 새로운 집이 고요히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나의 뿌리는 고향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집단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의식도 강한 전통 지향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삶이 외견상 뿌리 없이 보이고 때로는 극단의 일탈을 보일 때도 나는 그것들을 언제나 한시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으로만 받아들여 왔다.'(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그에게 고향 두들은 '감동'이기도 하고 '감옥'이기도 했으며 '실패의 예감을 자아내던 황무지'이기도 했고 '비옥함과 다사성을 감추고 있는 한 넓고 위엄 있는 영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뿌리이고 마침내 돌아갈 곳이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그의 집필실 벽에는 고향 집을 스케치한 액자가 걸려 있다고 한다.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지만, 이문열은 가장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이 시대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미국·프랑스 등 전 세계 20여 개국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현재 두들마을에 이문열의 학사채, 도서관과 영양군 소유의 건물 다수를 리모델링해 '이문열 문학관'을 조성하고 있고 내년 완공 예정이다.

글=류혜숙<작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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