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읍성 복원에 관한 고찰] 백성의 승리, 상주읍성 탈환 전투

  • 하용준 대하소설 '정기룡' 저자
  • |
  • 입력 2022-01-26 07:25  |  수정 2022-01-26 07:28  |  발행일 2022-01-26 제3면

2022012501000740300030161
하용준 (대하소설 '정기룡' 저자)

1592년 임진년 4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상주의 북천전투에서 승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왜장 도다 가츠타카(戶田勝隆)가 2천800여 병력을 거느리고 경상도 최대의 군사요충지 상주읍성에 주둔했다.

그즈음 정기룡이 상주읍성 탈환의 임무를 띠고 갑장산 영수암에 도착한다. 정기룡은 도다 가츠타카가 당교나 선산과 호응하지 못하도록 불시에 속전속결로 상주읍성을 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의병과 백성들이 조총을 가진 일본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1592년 11월23일 밤, 상주의 남쪽과 북쪽의 산 능선 가득 횃불이 타오른다. 그것을 신호로 읍성 서정에 모여 있던 부녀자들이 일제히 북과 징·꽹과리를 치고 태평소·나팔을 불어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을 일으킨다. 읍성의 서북쪽 담벼락에 쌓아 놓은 관솔 횃불에도 일제히 불이 붙었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크게 붙어 올라 세찬 불꽃이 하늘까지 뻗쳐 너울거린다.

잠결에 눈을 비비고 일어난 일본군은 크게 당황한다. 온갖 풍물 소리가 귀를 찢고 혼을 빼놓았으며 사방에서 시뻘건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남북 먼 산마루에서부터 가까운 읍성 주변에 이르기까지 조선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그 숫자를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의병과 백성들은 재빨리 남문 서문 북문에서 동시에 쳐들어간다. 읍성의 길과 지형지물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두운 밤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혼비백산할 뿐이었다. 유일하게 불길이 없는 곳은 동문 쪽이었다. 일본군 100여 명이 왜장 도다 가츠타카를 호위하며 동문을 나서는 순간, 밤나무 숲에 매복해 있던 의병과 백성들이 나타나 닥치는 대로 박달나무 방망이를 휘두른다. 일본군은 살이 터지고 머리가 깨지며 무참히 죽어나간다. 시체가 서로 포개어져 쌓이고 온 땅바닥으로 흐르는 핏물은 마치 비가 내린 것처럼 질벅하다.

상주 의병과 백성들은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승전했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노약자와 부녀자가 절반이 넘는 상황에서 조총을 가진 일본군 수천 명을 전멸시킨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후 정기룡은 6년 동안 상주를 거점으로 경상도를 굳건히 지킨다. 그런 까닭에 정유재란 때는 일본군이 정기룡을 두려워해 경상도를 통하지 않고 전라도로 쳐들어간 뒤 한양으로 북진하는 전략을 택했다.

현재 대다수의 상주 시민은 당시 정기룡의 지휘 아래 상주읍성 탈환의 주역으로 참가했던 의병 또는 백성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 기념비적인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기룡과 상주읍성을 복원하고 역사문화 콘텐츠로 널리 알리는 일은 진정한 상주시민이라면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가장 시급한 책무인 것이다.
하용준 (대하소설 '정기룡' 저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회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