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헌트' 연출·배우 이정재 "파워풀하면서 지루하지 않은 액션 지향…투톱 구조 밸런스 초점"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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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19   |  발행일 2022-08-19 제39면   |  수정 2022-08-19 08:27

놀라운 첩보 액션 영화의 탄생이다. 배우 정우성(김정도 역)과의 23년 만의 재회로 먼저 화제를 모았던 '헌트'이지만 베일을 벗은 후 모든 초점과 관심은 연출을 맡은 이정재에게 모인다. '헌트'는 기성 감독들마저 난색을 보였던 작품이다. 1980년대의 어지러운 정국이 배경이고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액션과 해외 촬영까지 소화해야 하는 방대한 스케일에 그들도 적잖은 부담을 느꼈다. 하지만 이정재는 연출 데뷔작이라 믿기 힘들 만큼 높은 완성도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첩보물 특유의 스릴러적 긴장감은 물론이고, 팩트와 픽션의 경계를 유연하게 타고 넘는 짜임새 있는 이야기, 매끈하게 구성된 액션과 볼거리가 흠잡을 데 없이 극에 녹아든다. "대의를 위한 두 남자의 선택이 많은 공감대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제작을 결심했다는 이정재는 '헌트'가 대중적인 장르물임과 동시에 인물들의 심리전을 긴장감 넘치고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30년 세월 동안 쌓아온 연기자로서의 경험을 녹여냈다. 무엇보다 각자의 신념에서 잉태된 파국을 통해 이 시대를 환기하려는 연출자의 시선이 선명히 드러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겪는 박평호 역까지 소화하며 준비된 연출가의 자질을 드러낸 그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남산' 시나리오 판권 산 것이 고생의 서막
가장 먼저 작품 주제·인물 설정 변화에 고심
동료 배우이자 절친 정우성 4번만에 출연 승낙

'오징어 게임'으로 주목 받아 해외서 러브콜
K-콘텐츠 집중 '제2의 오겜' 제작이 더 중요
연기자로서 한국영화 더 발전하도록 일조할 것

▶연출자로 데뷔한 소감이 어떤가.

"'아유~ 다시는 못할 것 같다.' 감독님들이 고사를 하시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맡긴 했는데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것도 그렇고 연기에 연출까지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다. 옳은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는 수많은 시선들을 견뎌야 하고, 이것이 옳은 결정이었다는 논리와 설득, 그리고 뭔가가 결정되면 모두의 힘을 모아 끌고 가야 하는 추진력도 있어야 한다. 신경 써야 할 게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쓸 수 있는 체력 내에서는 최대한 끌어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모두가 좋은 평가를 해주시니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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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물에 액션이라는 난도 높은 장르를 선택했다. '남산'이라는 시나리오의 판권을 구입하면서 '헌트'의 여정이 시작되었는데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나.

"판권을 구매했을 때 가장 먼저 주제와 인물들의 설정은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재밌고 의미 있게 볼 수 있다. 이후 몇 개의 주제를 놓고 고민했고 결국 신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 옳다면 다행이지만 그릇된 신념이라면 나는 어떻게 이것을 바꿀 수 있을지, 바꾼다면 이후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첩보물은 이야기 구조가 촘촘해야 하고 복선과 반전도 정교해야 한다. 거기에 인물들의 딜레마적 상황 표현도 중요하다. 단순히 남북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왜 갈등하고 대립하는가, 왜 끊임없이 대립과 분쟁이 일어나는가, 우리를 대립하게 만드는 이들은 누구인가 등의 주제를 놓고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

▶김정도와의 투톱 구조가 흥미롭던데 원래 시나리오에 있던 설정인가.

"아니다. '남산'에선 평호가 원톱이었다. 하지만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는 규모의 영화에서 원톱은 많은 리스크를 안고 있다. 대중들은 일단 많은 연기자들이 나오는 걸 선호하고 그들 각자의 색깔 있는 연기를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영화는 멀티캐스팅이 쉽지 않은 구도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지금의 투 톱 구조인데 이것 역시 녹록지 않았다. 일단 역할의 비중이 51%와 49%만 되더라도 캐스팅이 어렵다. 누가 봐도 '51%가 더 좋아 보이는데'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49% 역할로 캐스팅을 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 '다만 악'에서처럼 나는 굉장히 이상한 놈 역할이고, 상대방이 그와 상반된 역할이라면 그건 가능하다. 하지만 '헌트'에선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똑같이 안기부 내에서 근무하는 요원들이라 비슷한 캐릭터로 비칠 수 있다. 때문에 상황적으로 캐릭터를 더 돋보이게 하는 인물이 더 좋아 보이기 마련이라 똑같이 밸런스를 맞추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어려운 작업을 이제껏 한 번도 시나리오를 써본 적 없는 내가 하고 있는 거다. 내가 왜 이걸 붙잡고 세월을 보내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태양은 없다' 이후 정우성과 23년 만에 재회했다.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것 같다.

"우성씨를 섭외하는 것도 힘들었다. 1년에 한 번씩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그때마다 거절을 했다. 내가 쓴 시나리오가 처음에는 얼마나 허술했겠나. 우성씨도 좀 더 고쳐보라고 조언했고, 그렇게 계속 부족한 부분들을 수정해 나갔다. 수정하면 다시 보여주고, 그래도 부족하다고 하면 다시 수정해서 보여주는 과정을 연속으로 거치면서 결국 4번째서야 함께 하게 됐다. '둘이 친하고 같은 회사니까 당연히 출연했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 절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다. 오랜 절친이지만 일에 관한 한 철저히 프로정신에 입각한다. 그도 연기자로 입지를 굳힌 사람이고 제작자로, 또 감독으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단순히 친분 관계로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번 작업이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현장에 친한 동료가 있어 늘 든든했다."

▶멀티캐스팅 못지않은 많은 배우들의 우정출연도 눈길을 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극 중 등장한 배우가 누구인지를 찾는 재미까지 화제가 되면서 N차 관람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말 고마웠다. 다들 우리의 만남을 축하해주면서 도와줄 건 없냐고 먼저 연락을 해왔다. 너무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셔서 처음에는 안된다고 거절까지 했다.(웃음) 워낙 다들 강렬한 존재감과 개성을 지닌 분들이라 한두 명만 나와도 영화의 시선을 많이 빼앗기게 된다. 계속 집중해서 봐야 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긴장감을 놓칠 수 있다. 그들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고, 퇴장시킬지 고민이 되더라. 죄송하게도 일본 시퀀스에 다 몰아넣었다. 그들을 해외 팀 요원으로 등장시켜 도심 총격 신과 카 체이싱 후 일시에 빠지는 구도를 짰다. 물론 이성민 선배와 황정민 선배가 연기한 인물들은 연기력도 있고 비중이 있는 역할이라 내가 개인적으로 부탁을 드렸다."

▶'헌트'는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 영화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아웅산 테러 등 당시의 역사적·정치적 상황이 팩트와 픽션의 경계선을 리드미컬하게 넘어가며 묘사된다. 분명 녹록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80년대가 민감한 시대이기도 하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데다 해외 촬영도 필요했기에 규모가 클 수밖에 없다. 정지우 감독님, 한재림 감독님도 그런 부분들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신 것 같았고 주변의 만류도 있었다. 그렇다고 나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실 주제를 드러내는 데 80년대만큼 적절한 시기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메시지를 앞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원했다. 일단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20분 단위로 액션 신을 배치했다. 파워풀 하지만 길지 않은 액션을 지향했고 많은 상상력을 동원했다. 그 과정에서 훌륭한 제작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연출자의 길을 택한 건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가.

"우성씨를 보면서 자극을 좀 받았다. 같이 회사를 차렸지만 그는 연기하는 틈틈이 제작과 연출도 하며 나름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나만 놀고 있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연출을)해보니 힘든 점은 많지만 배우와 감독을 같이 하는 게 장점은 있더라.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수정까지 현장에서 하니까 좀 더 작품에 많이 빠져있을 수 있고,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상황에 따라 빨리 수정되고 진행되는 장점이 있다. 연기자로서는 연기에만 집중할 수가 없는 게 조금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뒤로하고 약속된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놓고 대화하다 보니 그런 아쉬움은 좀 덜해지기도 하더라. 현장에서 배우로서는 다시 찍고 싶은 장면도 많고, 연출로서는 더 준비를 해야 하는 게 많아서 데뷔작이니까 양해 부탁드린다는 말을 정말 자주 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남산' 판권을 산 게 고생의 서막이 됐다."(웃음)

▶'오징어 게임' 이후 이젠 전 세계인이 사랑하고 인정하는 배우가 됐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나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너무 좋은 시대를 맞이했다. '오징어 게임' 때문에 많은 분들이 나를 알아봐 주시고, 그 덕에 많은 해외 프로젝트 제안이 온다. 하지만 한국 콘텐츠에 집중해 제2의 '오징어 게임'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프로젝트 개발이 필요하다. 한국인들만이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에서 더 나아가 외국인들도 함께 즐기고 소통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드는 게 지금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한국은 인프라와 맨 파워가 좋다. 기술력도 할리우드와 견줄 정도가 됐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도 굉장히 수준급이다. 한국 콘텐츠가 해외에서 좋은 성과를 얻다 보니 해외 자본이 지금 많이 들어 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해외자본과 국내 제작진의 역량이 잘 맞춰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콘텐츠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연기자의 포지션에서 한국 콘텐츠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일조할 생각이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 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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