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반복, 사랑의 핵심

  • 고명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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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22  |  수정 2022-08-22 07:38  |  발행일 2022-08-22 제20면

[문화산책] 반복, 사랑의 핵심
고명재(시인)

'엄마, 엄마 오늘 나 원고 보냈어. 아빠, 아빠, 아빠가 준 사랑 덕분에 여기까지 쓸 수 있었어. 고맙고 고마워요, 빛나는 두 사람.' 얼마 전 첫 시집 원고를 송고한 뒤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했던 말이다. 이 말을 되돌아보며 새삼 놀랐다. 내가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구나. 엄마 엄마라든가 고맙고 고마워요 같은 말. 우리는 사랑할 때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는 존재'가 된다. 시가 그렇고 춤이 그렇고 소나타가 그렇다. 반복 속에 사랑의 핵심이 있다.

"그 이야기는 전에 당신에게 해준 적이 있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고 나니 또 해주고 싶어서요. 모든 사랑은 반복을 좋아해요. 그것은 시간을 거부하는 것이니까요."(존 버거 'A가 X에게' 中) 정치범으로 갇힌 무기수 연인을 위해, 여자는 끝없이 편지를 쓴다. 여기서 반복은 '내용의 전달'을 중시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사랑을 거듭 고백하는 것. 이처럼 반복은 '충실한 복사(copy)'가 아니다. 반복은 같은 것을 되풀이해도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어떤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act)'다. 그래서 시와 음악과 기도문은 반복하는 것이다. 무력한 줄 알면서도 거듭하는 것.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永遠히 슬플 것이오."(윤동주 '八福') 정확히 여덟 번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핍박에 대한 보상을 논하는 마태복음의 5장을 변용하면서, 윤동주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시)을 썼다. 놀랍게도 여기엔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 그저 아픈 시대 속에서 슬픔을 의무화하며, '영원(永遠)히' 슬픔을 지속하고자 한다. 이 반복 속엔 울분과 분노와 슬픔이 있고, 무엇보다도 세계에 대한 사랑이 있다.

예전에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할머니라든가, 염불이라든가, 니체의 영원회귀 같은 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들은 기꺼이 반복하고자 했을까. 반복을 통해 그들이 가닿고 싶은 건 뭐였나. 사람이 죽고 계절이 돌고 별자리가 바뀌고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녹아내리고. 그런데도 자꾸만 되돌아오는 어떤 '자리'가 있어서, 나는 느리게 '철이 드는' 경험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윤회라는 불가의 교리도 실은 삶으로 쓰는 '반복의 시'를 뜻한 건 아닐까. 지금도 성당 옆을 걸으면 낮은 기도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주로 반복적인 구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일한 박동을 끝없이 내뿜는, 우리의 심장처럼.
고명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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