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언어의 힘

  • 안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연구교수
  • |
  • 입력 2022-08-25   |  발행일 2022-08-25 제22면   |  수정 2022-08-25 06:47
한국 대표작가 '최인훈' 연구
인도출신 국문학자 칸 앞잘
한국문화와 문학 이해 바탕
한국·인도의 문화교류 통해
우호증진 계기 역량 발휘해

2022082401000746700029591
안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연구교수

인도인.

필자가 근무하는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BK교육연구단에는 인도인 연구교수 선생님이 계신다. 지난주 그 인도인 선생님께서 "다음 주 월요일 회의는 순연됐어요"라고 말했는데 필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몇 번이나 "네?" "뭐라고요?"라고 되묻는, 웃픈(웃기면서 슬픈) 해프닝이 있었다. '순연(順延)'은 '차례로 기일을 늦춤'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이 말을 들었을 때 필자에게 순연은 '모르는 단어'였다. 보통 외국어를 배울 때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하지만 모국어도 모르는 단어는 잘 듣지 못한다.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웹 사전인 '우리말샘'에서 '의미'로 끝나는 단어를 검색하면 '감정적 의미, 개념적 의미, 관용적 의미, 맥락적 의미, 문법적 의미, 사회적 의미, 함축적 의미' 등 78개나 찾아진다. 우리는 수십·수백 가지의 의미를 가진 단어를 수만·수십만 개나 익혀서 언어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다.

다시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와서, 이 글의 제목은 '낚시성 기사 제목'으로 분류될 만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최근 종영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단어는 '우영우'가 아니라 '인도인'이다. 그 인도인은 고향에서 5천㎞나 떨어진 한국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의 대표 작가 '최인훈'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특별'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글의 제목 때문에 기사를 읽고 있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인도인은 '스위스'와 '별똥별' 사이에 나열된 '그냥 의미 없는' 단어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난 여름방학에 인도인 친구와 함께 스위스의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히 많은 별똥별을 봤어"라고 말한다면 이 문장에서 드라마 '우영우'를 생각해 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사회·문화적 배경이나 담화의 앞뒤 상황을 이해해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의미를 '맥락적 의미'라고 한다.

우리말에는 인도의 신화와 역사, 문화적 맥락을 이해해야 제대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보통 이 단어들은 불교에서 온 단어들이 많다. '아수라, 염라, 수리수리마수리, 나무아미타'처럼 범어(梵語·Sanskrit)에서 직접 차용된 단어도 있고, '업보, 보시, 고독, 체용'처럼 한역(漢譯)되거나 불교 경전과 관련된 단어도 있다. 수리수리마수리는 엉터리 주문을 욀 때 사용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함부로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신적인 존재를 부르는 표현이다. 급고독(給孤獨)은 부처님에게 기원정사를 지어 바친 수다타(須達·sudatta)의 별명으로, '석보상절'(1447) 권6에서 '고'는 어려서 어버이가 없는 사람이고, '독'은 늙으되 자식이 없어 혼자인 사람이라고 하였다. 체용(體用)은 본질(體)과 현상(用)을 뜻하는 말로, 유교에서 차용하여 심화시킨 개념이다. 국어 시간에 배운 품사 분류에서의 체언과 용언도 이 개념을 활용한 것이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시간을 그 일에 할애한다는 뜻이다. '순연'이라는 단어를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쓰기까지 칸 앞잘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필자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와 대화할 때는 그의 한국 문화와 한국 문학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심오한지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이제 그가 경북대 아시아연구소로 거처를 옮겨, 개인적 연구뿐 아니라 한국과 인도의 문화 교류와 우호 증진을 위해 역량을 발휘하려 한다고 한다. 그의 새로운 여정에 건강과 행복, 영광이 그와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안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연구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