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부터 바닷길까지, 포항 힐링로드 .9] 장기읍성…山海 벽으로 막힌 오지 외로이 지키는 '천년 古城'

  • 류혜숙 작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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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29   |  발행일 2022-08-29 제21면   |  수정 2022-09-05 07:14
경주 동쪽 외곽지대로 군사 요충지
고려 토성을 조선 세종때 석성으로
송시열·정약용 등 유배지로도 유명
학문·예절 숭상 '유배문화' 꽃피워
동해안 마을 중 서원 12개나 세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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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남쪽 끝인 장기면은 경주의 동쪽 외곽지대라 신라 때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 읍성이 있었다. 고려 때 왜적과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읍성의 북쪽에 성을 쌓았다. 지금의 장기읍성 자리다. 처음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세종 때 석성으로 더욱 굳건히 쌓았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가파르다. 아랫마을이 자그맣게 멀어질 즈음 산은 긴박한 사선으로 떨어진다. 그 위로 하늘과 맞닿은 성벽의 곡선이 보인다. 사라져 저절로 열린 채인 문 위로 나무 한 그루가 파수꾼처럼 서 있다. 성벽은 산정에서 흘러내린 주름진 산자락을 타고 구불구불 이어진다. 천천히 상승하고, 평탄하다가도 깊이 떨어져 다시 날아오른다. 서쪽으로는 산이 연이어진다. 남쪽과 북쪽으로는 마을이 멀다. 동쪽은, 바다다. 탁 트여 눈부신 시야를 가졌으나 섬처럼 외로운 성, 장기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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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면사무소 정원에는 흥선대원군이 세운 '장기척화비'가 있다. 원래 읍성 안에 있었으나 이곳에 자리하게 됐다.

◆바다를 지키던 산정의 마을, 장기읍성

산은 동악산(東岳山), 고도는 해발 252m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동악산은 '거산(巨山)이 고을을 지켜준다는 뜻의 진산(鎭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기면은 포항의 남쪽 끝이다. 장기(長기)는 '긴 갈기'라는 뜻으로 긴 해안의 모습이 말갈기와 같다고 생긴 이름으로 추측된다. 경주의 동쪽 외곽지대라 신라 때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 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고려 현종 2년인 1011년에 동쪽으로는 왜적을 막고 북쪽으로는 여진족의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옛 읍성의 북쪽에 성을 쌓았다. 지금의 장기읍성 자리다. 처음에는 토성이었다. 이후 조선 세종 때인 1439년에 이르러 석성으로 더욱 굳건히 쌓고 동해안의 군사기지 및 치소( 治所)로 이용했다. 당시에는 동·서·북쪽에 3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동헌과 관청 소속의 다양한 건물들과 4개의 우물, 그리고 2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입구는 동문이다. 문은 사라졌고 그곳엔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뒤로 '배일대(拜日臺)'라 새겨진 바위가 동그마니 자리한다. 저 아래 장기초등학교에서 저 멀리 신창리 바다까지, 그사이 드넓은 현내들과 바다로 달리는 장기천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다. 동문에는 '조해루(朝海樓)'라는 문루가 있었고 정월 초마다 장기 현감이 태양을 맞이하며 제를 올렸다 한다. 서문은 우직해 보이는 옹성으로 남아 있고, 북문은 최근 복원되어 문루가 올라 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약 1.4㎞로 12개의 치성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지금도 성안 마을에 사람들이 산다. 마을을 둘러싼 공기는 고인 듯 잔잔하다. 이따금 괜스레 개가 짖고 커다란 대숲이 파도 소리를 낸다. 마을의 한가운데에는 장기향교가 자리하고 옛 관아인 동헌 터가 남아 있다. 향교는 장기초등학교 동쪽에 있던 것을 1931년에 성안에 옮겨 세운 것이고, 성안에 있던 동헌 건물인 '근민당'은 1986년 장기면사무소 안에 복원해 두었다. 면사무소 정원에는 '장기척화비'가 있다. 구한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 흥선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전국의 요지에 세운 척화비 중 하나다. 장기척화비는 원래 장기읍성 안에 세워져 있었으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봄에 장기지서 입구에서 찾은 것이라 한다.

◆우암과 다산의 유배지 장기

장기는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한편으로는 산해의 벽으로 막힌 오지였다. 한양에서 십여 일을 걸어 도착하면 그곳이 곧 섬이었던 땅, 그래서 옛날 장기는 유배지였다. 조선 태조 1년 설장수를 시작으로 홍여방·양희지·김수흥 등 수많은 사대부가 장기를 거쳐 갔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다.

우암은 숙종 때인 1675년 5월, 임금과 왕후의 사후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벌인 제2차 예송논쟁으로 이곳으로 유배되어 마산촌 오도전이라는 이의 집에서 약 5년간 머물렀다.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에게 장기는 자신과 대립하는 남인의 땅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우암을 통해 유학의 핵심과 중앙정계의 움직임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많은 시문과 '주자대전차의' '이정서분류' 등의 책을 썼다. 우암은 숙종 5년인 1679년에 자신이 머물던 사관 안에 자생하던 느티나무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는 거제도로 떠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인 1801년 3월, 장기 땅에 도착한 이는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신유년의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마현리 성선봉(成善封)의 집에서 7개월간 생활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다산은 마을 사람의 삶과 고을 관리의 목민 형태를 담은 '부옹정가'와 '기성잡시 27수' '오적어행' '장기농가 10장' 등 130여 편의 시를 남겼다. '기성잡시' 중에 '느릅나무 숲을 거닐며'라는 시가 있다. '지팡이 짚고 시냇가 사립을 나와/ 고운 모래 밟으며 천천히 걸어보니…/ 느릅나무 잎사귀 토한 듯 무성한데/ 우거진 녹음 아래 둘러앉은 촌사람들…/ 나라 다스리는 방책을 알려거든/ 마땅히 농부들에게 물어야 할 일.' 다산이 거닐었던 느릅나무 숲은 지금 몇 그루의 나무로 남았지만 그의 걸음은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산은 그해 10월20일, 백서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우암이 머물렀던 마산촌의 집과 다산이 머물렀던 마현리의 집은 지금 장기초등학교 근방으로 짐작된다. 읍성 아래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고목이 한쪽에 서 있고, 그 옆에는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다산과 우암은 때때로 장기읍성의 배일대에 올라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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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유배문화체험촌'에는 조선시대 유배 문화에 대한 여러 전시물을 비롯해 우암과 다산의 적거지·오도전의 안채 등 유배된 사람들이 거주했던 가옥들이 재현되어 있으며(위) 당시의 모습을 예상할 수 있는 모형들이 구현돼 있다.

◆장기에 꽃핀 유배문화, 유배문화체험촌

우암이 장기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전국의 많은 선비가 그를 찾아 장기로 왔다고 한다. 노론과 소론 분당의 계기가 된 곳도 장기라고 알려져 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이후 제자들은 죽림서원을 세워 학문에 정진했고, 우암이 기거했던 집의 주인장인 오도전은 선생에게 학문을 배워 훗날 향교의 훈장이 되었다 한다. 다산은 장기에 있는 동안 마을 사람들과 매우 밀착해 살았다. 기간은 짧았으나 그가 남긴 글들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느끼게 한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이 궁벽한 해곡으로 유배된 이들은 무려 220여 명에 이른다. 그들은 우암과 다산과 같은 석학들이거나 지식인 또는 중앙의 고위 관료들이었다. 장기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몸을 누이면 머리끝과 발끝이 닿는 초가집 작은 방에서도 글 읽고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지역민과 교류하면서 지역의 선비들을 가르쳤다. 조선시대 장기에 세워졌던 서원은 무려 12개나 된다. 장기는 인근 동해안 마을 중에서도 가장 많은 서원이 있던 고을이었다. 그러한 시간을 거쳐 장기에는 학문을 숭상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고, 서원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다.

수많은 석학이 장기에서 보낸 유배의 시간은 이 고장을 학문과 예절을 중요시하는 유교의 마을로 변화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그것은 유배라는 상황이 벽지에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 특별한 유배문화였다. 이러한 장기의 유배문화를 느낄 수 있는 체험촌이 있다. 장기읍성 북문에서 '다산과 우암의 사색의 길'을 따라가면 약 9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이 자리한다. 조선 시대의 유배 문화에 대한 여러 전시물을 비롯해 우암과 다산의 적거지·오도전의 안채 등 유배된 사람들이 거주했던 가옥들이 재현되어 있으며 당시의 모습을 예상할 수 있는 모형들이 구현돼 있다. 또한 유배 가마와 곤장·주리·칼 등의 형벌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이 외에도 전통놀이체험·전통음식체험·한지뜨기·베틀짜기·고서 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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